[김환표의 ‘TV 드라마, 현대사를 만나다’: 7회]
시청료 징수는 ‘샤일록적 경영방식’
앞서 이야기했듯이, 군사정권은 KBS-TV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개국했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탈이 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부족한 재원이었다. 국영방송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군사정권은 KBS 운영에 막대한 국고 를 지출해야만 했다. 결국 KBS 운영 비용에 부담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법을 개정해 1963년 1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등록된 수상기 3만4천대에 시청료를 징수하고 광고방송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박정희 정권은 AFKN보다 더 내실있는 방송을 내보내겠다는 이유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했을 뿐 가장 큰 이유는 KBS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청료 징수는 당장 시청자의 반발을 샀다. 시청자들은 “정초부터 값비싼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낙후된 경제 상황 속에서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살이에 시청료까지 징수당해야 했으니, 시청자가 느꼈을 분노의 크기는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시청료를 징수하려는 정부와 시청료 내는 것을 거부하는 시청자 사이에 한 판 싸움이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특히 시청료 징수원들이 미등록 수상기를 찾아내려는 과정에서 마치 사법권이 있는 것처럼 행세해 원성은 더욱 더 커져갔고, 시청료 징수원들은 미등록 수상기를 찾아내기 위해 동네 아이들에게 과자를 주어 현혹시키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광고 허용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광고 허용으로 인해 시청자들은 이중 부담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63년 1월 12일 사설 <‘텔레비’의 광고방송에 이상 있다>는 “어찌해서 국민의 세금으로 설립 운영하는 관영방송이 ‘스폰서’제의 자의로 만들어낸 ‘프로’를, 시청자를 무시한 그 ‘프로’를 그대로 내보낼 수 있단 말인가”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프로’를 편성해 놓고도 시청료를 받아내는 당국의 ‘샤일록’적 경영방식이다. 도대체 돈을 내고 광고를 구경하라는 뱃심도 대단한 것이지만, ‘스폰서’한테도 돈을 받고 시청자한테도 돈을 거둬내는 그 방법은 이른바 ‘꿩먹고 알먹는’ 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차대전후 서독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는 하나 현재 이와 같이 이중으로 돈을 거둬내는 ‘샤일록’ 금고 같은 TV는 어느 나라에서든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1년분의 시청료인 1천 2백원의 과태료를 각오하고서라도 신고를 이행치 않겠다는 시청자가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TV시책이 얼마나 시민들의 악감정을 사고 있는지 췌언할 여지가 없다. 더구나 광고방송 제2단계로 ‘프로’의 70%를 ‘스폰서’제로 할 계획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더구나 시청자에 대한 요금징수는 한층 불합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샤일록적’ 심보라는 비판이 말해주듯, 당시 시청자들의 TV 광고에 대한 거부감은 무척이나 컸다. 광고가 낯설었기 때문으로, TV 광고에 대한 비판은 당시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발전 정도나 의식화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광고 방송은 대단히 천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컨대, 광고 방송을 전담했던 여성 아나운서들은 “장터의 약장수가 약 선전을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 기피하기 일쑤였고, 일부 성직자들은 “주여! 상업방송을 금지시켜 주시옵소서”라며 기독교방송 CBS에 광고 방송이 상륙하는 것을 죄악시하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상업적 목적이 개입된 신문의 TV 광고 비판
광고 허용에 대해 날선 반응을 보인 이들은 여성보다는 남성들이었다. 이와 관련 정완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텔레비전 1년 반에 가장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프로그램 전반이 가난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2대의 카메라로 옹색한 방송을 보내는 것을 보면 정말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TV 수상기 추점에 들어간 행운아들의 시청소감 제1호가 ‘이런 방송이라면 결사적으로 수상기를 구한 보람이 없다’는 투정이었다. 만사 제쳐놓고 TV 앞에 앉은 주부, 미성년층, 그리고 특히 식모아가씨 등 단골 시청자 중에서 가장(家長)은 이미 TV와 단골 해약을 한 지 오래다”
신문 역시 광고 허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나섰다. 『조선일보』 63년 1월 8일자 <TV 광고방송의 ‘모랄’>은 “KBS-TV가 광고 방송을 함에 있어서 가장 우려된 점은 국영방송의 권위와 체모를 손상시키지나 않나 하는 ‘모랄’문제였다”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외국에서도 생산제품의 공장이나 시설 등은 시각을 통해서 선전하지 않기로 되어 있는데 극장 ‘스크린’에 쓰던 ‘필름’을 그대로 방송하고 있는가 하면 ‘메인 프로’에서는 직접 선전을 해서는 안 되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난주의 주부시간에서는 요리 강좌 중 선미계가 출연자의 입에서와 화면에서 직접 선전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두통 치통에는 콤푸랄 콤푸랄’ 등 마치 ‘라디오’의 광고방송에서 하고 있는 직접선전을 시각으로까지 옮겨와 시청자들의 상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리고 광고 방송 개시이후 외국영화를 비롯하여 ‘드라마’ 연에 오락 등 ‘프로’가 많아지고 광고 ‘프로’가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광고방송을 하면서까지 시청료를 받는다는 것은 과연 옳은가에 대하여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의아심을 품고 있다.”
동아일보』역시 1963년 1월 12일자 사설 <국영 ‘텔레비전’의 운영의 문제점>에서 “국영방송이 어느 특정기업주를 위한 광고행위를 대행해서 수익을 올린다는 것은 원칙상 금기되어야 할 일이고 단견의 탓인지는 모르나 우리는 그러한 선진국의 사례도 찾아볼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력한 국영방송이 광고방송을 취급한다는 것은 민간방송의 발전을 국가가 금지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한편 시청자의 편에서 생각할 때 시청료를 징수하면서까지 불필요한 광고 프로의 시청을 강요당하는 셈이다. 따라서 조만간에 국영방송이 광고 ‘프로’를 취급하는 발상은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보며 한편 수상기보급을 금지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는 시청료제도는 적절한 시기에 금지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신문이 시청료 징수를 광고 허용 문제와 함께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리긴 했지만, 광고 허용에 대한 신문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광고 물량이 감소할 것을 우려한 상업적 목적이 개입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언론시장은 광고 시장으로 광고 시장은 그 나라의 경제규모와 밀접한 관련을 맺기 마련이다. 통상 광고시장 매출은 GDP의 1% 내외를 차지하는데, 경제 후진국을 면치 못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TV의 광고 허용은 신문에겐 ‘악재 중의 악재’였다. 한정된 광고 시장을 두고 TV와 경쟁을 벌여야만 하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스폰서의 횡포에 노출된 드라마
KBS의 재원 마련을 위해 허용했지만, 광고 허용의 특수는 ‘라디오’가 누리기 시작했다. TV 시대가 개막했다곤 하지만, 여전히 TV의 보급률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광고를 두고 라디오 방송국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최일선엔 드라마가 섰다. 시청자가 가장 선호하는 프로그램인 드라마를 활용해 청취율을 높이겠다는 계산이었다. 물론 드라마의 대다수는 멜로물이었다.
『조선일보』 1964년 2월 9일자 <연속방송극 한결같은 눈물공세 : 영화화위한 사전 PR>은 “여기를 틀어도 한숨 섞인 통속극, 저기에다 ‘다이알’을 돌려도 당의정 신파극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나오는 형편”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십회건 삽십회건 매일 한편씩 연속 ‘드라마’의 전파를 탔던 방송극이란 방송극은 백이면 백 모두가 무슨 불문율이나 지키듯 반드시 영화화되는 한국적인 실정이고 보면 그러한 경향을 이해할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같은 ‘멜로드라마’라 할지라도 담고 있는 내용이나 소재가 천편일률적이고 빤히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안이한 줄거리의 전개에 있는 것이다. …거의 전부의 작품에 울음과 눈물이 푸짐하게 담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공교로운 우연과 작위(다 있는 ‘케이스’가 많다)로 ‘사건’과 ‘일’이 벌어지고 삼각 사각의 인간관계가 얽히고설켜 슬픔과 기쁨으로 양념을 치는 ‘메로드라마’ 유형의 이 작품들. …이것은 영화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비판하게 받아들이는’ 저속 흥미일변도의 청취자 관객에게도 태반의 책임이 있는 것이지만 다른 또 하나의 큰 원인은 극작가 및 소재의 빈곤을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대중에 영합하는데 통속극 ‘멜로드라마’는 그 존재를 떵떵거리며 연속방송극의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고 있다. 과연 연속 ‘드라마’ ‘붐’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한때의 연속방송사극 ‘붐’에 이은 이 바람은 현재 그 전성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광고 유치를 두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드라마 제작은 급속도로 스폰서에 예속되기 시작했다. 드라마 제작과 관련해 스폰서의 횡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스폰서가 드라마 작가를 아예 지정해 버리는 경우였다.
『조선일보』 64년 7월 8일자 <어느 횡포? 민간방송과 스폰서>는 “전파를 민영화한 민간방송이 생긴지도 이제 몇해가 지났고 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방송의 내용이나 형태가 제법 궤도에 오르기도 한 셈인데, 요즈음 바늘에 실가는 격으로 상업방송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스폰서’의 지나친 간섭과 그에 따른 방송내용의 저속화가 문제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골든 아워’라고 불리는 저녁시간에 연속 ‘드라마’를 ‘사가지고’ 청취자에게 상품 선전을 하는 것이 가장 알기쉬운 ‘스폰서’의 예인데, …요즈음은 그런 일이 드물어졌지만 가장 민간 방송국의 속을 썩히는 것은 연속방송극의 작가와 작품을 업고 들어오는 경우, 예를 들면 A 제약사는 40만원을 내고 사버린 20분짜리 연속극시간에 방송국 ‘프로듀서’와는 아무런 협의없이 B라는 방송극작가를 데리고와서 ‘이 사람의 작품을 내보내도록 하자’고 명령(?)하는 것이다. …웬만한 방송국이고 제대로 된 ‘프로듀서’라면 ‘노!’겠지만 방송국 업무관계의 압력 때문에 때로는 이것이 통하는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방송국은 유명무실 바로 그것이고 적어도 그 연속극 시간은 ‘스폰서’ 마음대로가 되는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저번엔 방송국측 추천작품이 나갔으니 다음은 이사람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류작가 아닌 극작가 중에 가끔 ‘스폰서’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사람도 생기고 또 극단적인 경우에는 ‘드라마’의 줄거리나 인물설정에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는 ‘스폰서’도 있고 하는데 이쯤되면 방송국의 자주성은 물론 방송의 공공성까지 침해당하는 것이다.”
TV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디오에 비해 제작되는 편수가 적었다 뿐이지 TV 드라마 역시 스폰서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전 KBS PD 김연진은 “지금처럼 광고주가 방송사를 찾는 게 아니라 방송사가 ‘TV에 광고 좀 내주십시오’ 하고 굽실거리며 광고주들을 쫓아다닐 때였으니 광고주들이 위세를 부릴 만도 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니 광고주들이 횡포 또한 얼마나 컸겠는가. PD들에겐 시어머니가 또 하나 생긴 셈이었다. 드라마 쇼프로에 광고가 붙으면 ‘이러이러한 연예인들을 등장시켜 주시오’하고 주문까지 하니 출연진을 물론 작가나 PD까지 어처구니없게도 광고주들의 입맛을 맞출 정도였다. 그 즈음 “술을 너무 많이 마십니다” 하는 ‘금주’를 주제로 한 내용의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붙은 광고가 어처구니없게도 ‘소주광고’였다.
“이 술을 한 잔 크윽 마시면…만사가 콰아악…!”
난센스 중의 난센스였다. 물론 당시 소주광고 말고도 성적 충동을 유발시키는 선정적인 내용의 광고가 판을 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둔부를 내보인 광고도 있었고 유방이나 반라의 해괴한 장면을 담은 내용의 광고도 있었다.
광고 허용은 이른바 TV의 저속화 논란을 촉발시켰으며 이후의 역사가 말해주듯, 저속화 논란을 증폭시키는 데 가장 앞장 선 것은 신문이었다.
참고문헌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대편 2』(인물과사상사, 2004), 260쪽.
김연진, 『내 연출 내 젊음 : 김연진의 TV 비망록』(다인미디어, 2000), 300쪽.
김재길, 『“KBS야, 너 참 많이 컸구나!”』(세상의창, 2000), 65쪽;
정순일.장한성, 『한국 TV 40년의 발자취: TV 프로그램의 사회사』(한울아카데미, 2000), 72쪽에서 재인용.
<‘텔리비’의 광고방송에 이상있다>, 『경향신문』, 1963년 1월 12일 2면.
<국영 ‘텔레비전’ 운영의 문제점>, 『동아일보』, 1963년 1월 12일, 2면.
<TV 광고방송의 ‘모랄’>, 『조선일보』, 1963년 1월 8일, 조간8면.
<연속방송극 한결같은 눈물공세 : 영화화위한 사전 PR>, 『조선일보』, 1964년 2월 9일, 5면
<어느 횡포? 민간방송과 스폰서>, 『조선일보』, 1964년 7월 8일, 조간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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