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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과 프랑스의 80년 갈등

 영국에서의 명예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어 거의 80년 동안 전쟁이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런 일련의 전쟁은 아메리카 대륙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윌리암 왕의 전쟁(King William's War, 1689-1697)은 뉴잉글랜드 북부에서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었으나 단지 몇 차례의 엉거주춤한 충돌을 야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1701년에 시작돼 거의 12년 동안 계속된 앤 여왕전쟁(Queen Anne's War)은 심각한 충돌이었다. 이 전쟁으로 남부 변경지역에서 스페인과의 싸움이 일어나고, 북부에서는 인디언과 합세한 프랑스인과의 싸움이 동시에 일어났다. 1713년 유트레히트(Utrecht)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간의 갈등이 종식되었고, 프랑스는 북미 대륙의 상당한 영토를 영국에게 양도했다. 20년 후에 스페인 식민지에서의 영국인의 교역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는 유럽에서의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그들이 조지 왕의 전쟁(King George's War)이라고 불렀던 이 전쟁에 끌려들어가서 1744년부터 1748년 사이에 프랑스인과 일련의 싸움을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 대륙에선 거의 1세기 동안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으나, 1750년경부터 정착지 분쟁이 일어났다.

 프랑스 탐험대는 1680년대에 미시시피강 삼각지대까지 남하해서 그 주변지역을 프랑스 영토라고 주장했고, 그곳을 루이 14세를 기리는 뜻에서 루이지애나(Louisiana)라고 불렀다. 그후 상인과 선교사들이 남서부 방면으로는 리오그란데 강까지, 서쪽으로는 록키 산맥까지 진출했다. 프랑스는 인디언과 평화공존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인디언 연맹, 즉 이로쿼이연맹(the Iroquois Confederacy)과는 가깝지 않았다. 모호크족, 세네카족(Seneca), 카유가족(Cayuga), 오논다가족(Onondaga), 오네이다족(Oneida)의 5부족이 방어를 목적으로 15세기에 맺은 이로쿼이연맹은 1640년대 이래로 오하이오 계곡과 그 주변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미시시피나 오하이오 등의 지명은 인디언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영어에 아름다운 모음의 울림을 지닌 인디언 말이 섞이게 되면 듣기좋은 음악적 효과를 내는데, 오늘날 미국 각 주의 이름에 인디언 말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오하이오(위대한 강, 아름다운 강), 미시건(위대한 호수), 미네소타(하늘빛 물), 미시시피(아버지인 강, 큰 강), 미주리(커다란 카누의 마을), 아이오와(아름다운 대지), 다코타(사이좋은 벗), 위스콘신(물이 모이는 곳), 아이다호(태양이 뜨는 땅), 오클라호마(붉은 사람) 등은 모두 인디언 말을 어원으로 삼고 있다. 이밖에도 앨라배마, 테네시, 아칸소, 네브라스카, 캔자스, 텍사스, 유타, 애리조나 등도 모두 인디언 말에서 온 것이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 또는 ‘7년 전쟁’

 1754년 버지니아 총독은 프랑스의 세력확장을 저지하려고 오하이오 계곡으로 경험이 없는 젊은 민병대 대령의 지휘하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는 버지니아 마운트 버논(Mount Vernon) 출신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이었다. 이 싸움에서 3명이 죽자 워싱턴은 항복했는데, 이 싸움은 젊은 워싱턴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는 프랑스 외교사절을 전투부대로 착각하고 새벽에 그들을 급습해 죽였기 때문이다. 윌스(Wills 1999)는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학자들은 그가 악한이었기 때문에 외교관들을 죽였는지 아니면 단지 무식해서 그랬는지를 놓고 토론했다. 그는 수년동안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해야만 했고, 그래서 체면을 유지하는 것을 최고의 관심사로 삼았다.”

 역사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바로 이 충돌이 ‘프랑스인과 인디언의 동맹 전쟁’의 발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공식적으론 7년이지만 사실상 9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로쿼이 연맹 인디언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인디언들이 프랑스와 손을 잡았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1750년대와 60년대에 벌어진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무역과 해상 지배권을 놓고 싸운 전쟁의 일부였다. 미국에선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6-1763), 유럽에서는 7년전쟁(the Seven Years' War)로 알려진 이 전쟁은 1757년 윌리암 피트(William Pitt)가 영국의 새로운 수상으로 등장하면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는 유럽에서의 전쟁보다 먼저 미국에서 프랑스를 몰아낼 것을 결심하고 영국군대를 미국에 총동원시켰다. 1757년 23,000명의 육군과 14,000명의 해군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1758년 영국군은 포트 뒤케느(Fort Duquesne)를 점령한 다음 그것을 피트 수상의 이름을 따라서 피츠버그(Pittsburgh)로 명칭을 바꾸었다. 1759년 프랑스의 나이아가라 항과 퀘벡이 영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특히 제임스 울프(James Wolfe) 장군이 극적으로 퀘벡을 함락시키면서 전세를 역전시킨 것은 많은 아메리카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1760년 1월 벤저민 프랭클린은 ‘에이브러햄 평원’에서 울프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것을 예찬하며 ‘나는 영국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천명했다.

 1760년에 프랑스는 몬트리올마저 영국에 빼앗겼다.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인디언들이 폰티악(Pontiac) 추장을 중심으로 영국군을 공격하였으나 그것도 실패로 돌아갔다. 프랑스는 1763년 오랜 협상 끝에 파리조약을 맺어 영국의 승리를 승인하고 북으로는 세인트 로렌스 강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미시시피강 동부, 그리고 남쪽으로는 플로리다와 뉴올리언즈를 제외한 전 지역을 영국에 넘겨주었다.

 영국의 식민지 지배력은 강화되었지만 전쟁으로 영국은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고 식민지인들이 전쟁에 잘 협력하지 않았다고 분개했다. 반면 1756-57년 사이의 영국의 강제 요구 사항과 징병을 둘러싼 갈등과, 1758년에 뒤따른 식민지 의회의 권한 회복은 많은 식민지인들에게 식민지 일에 대하여 영국이 간섭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해 준 듯하였다.

 7년전쟁이 끝나자 프랑스는 동맹자였던 인디언들을 무시하고 오하이오주 계곡에 있던 자신들의 영토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그래서 한동안 인디언과 영국군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영국군은 천연두균이 있는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보내는 등 세균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1763년 평화조약이 체결돼 영국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ts.)의 서부 지역을 인디언 영역이라 선언하고 식민지인들의 진출을 제한했다. 이미 그곳에 들어가 있는 식민지인들을 철수하도록 명령하고 인디언과의 무역을 허가제로 제한했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북아메리카의 동부를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있는 산맥으로 남북의 길이는 약 2천 킬로미터, 넓은 곳의 폭은 약 4백 킬로미터에 이른다. 애팔래치아 산맥과 서부의 로키 산맥 사이엔 세계 7대 평원 중 하나로 손꼽히는 폭 2천 킬로미터의 대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금했으니 식민지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식민지인들은 영국의 이러한 정책을 인디언과 모피 상인만을 보호하고 자기들의 서부 진출을 방해하려는 음모로 생각하고 분노했다. 이것이 식민지인들이 영국에 저항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영국과 식민지 아메리카의 갈등

 명예혁명 후 50년 동안 영국 의회(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합병된 후부터는 영제국 의회가 됨)는 왕에 대하여 우위권을 확립했다. 독일에서 태어나서 영국식 방법에 서투른 조지 1세(1714-1717)와 조지 2세(1727-1760)의 집권기 중 수상과 그의 내각이 나라의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들 의회 지도자들은 식민지 제국에 대하여 17세기 군주들이 통제를 강화시키려고 했던 것보다 덜 간섭적이었다. 식민지에 통제를 가하면 식민지 무역 이윤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는 상인과 지주들에게 정치적으로 의존한 탓이었다. 그 결과 식민지 일에 대하여 책임지는 통합된 기구가 없었고, 식민지 통치는 비효율적이고 분산된 상태를 유지했다.

 그래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1750년대 말까지도 자신들이 영국 제국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흔쾌히 인정했다. 그걸 인정한다고 해서 손해볼 일이 없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벤저민 프랭클린이 ‘나는 영국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천명한 것도 그런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북미에서의 식민지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식민지인들의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서진(西進)을 금지한 1763년 국왕 포고령은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건 명백한 이해득실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반발의 대표적인 사례가 펜실베니아의 서부에서 발생한 이른바 ‘팍스톤 보이들(Paxton Boys)의 난동’이었다. 이들은 팍스톤이라는 펜실베니아의 서부 프런티어에 거주했던 농부 개척자들로서 대부분 장로교도였다. 펜실베니아의 중심세력인 퀘이커교도에 대한 불만도 작용했다. 1763년 겨울 팍스톤 보이들은 퀘이커 교도의 사주를 받은 인근 인디언들이 그들 사회를 염탐한다는 소문에 흥분해서 인디언들을 공격했다. 인디언들은 식민지 정부에 보호를 요청하였고 이내 랭커스터(Lancaster) 감옥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팍스톤 보이들은 감옥을 습격해 은신해 있던 14명의 인디언들을 몰살했다. 놀란 주변 인디언들이 펜실베니아의 수도 필라델피아에 피신하자 팍스톤 보이들은 거기까지 무장 진출해서 인디언을 보호하려는 식민지 군대와 유혈 접전을 벌이고자 했다. 팍스톤 보이들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중재로 식민지 정부에게서 좀더 강화된 군사적 보호를 받을 것을 약속받고 해산했다.

 백인들의 ‘인디언 사냥’

 이미 오래전부터 백인들의 인디언 통제는 ‘인디언 사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혹한 면이 있었다. 백인들은 인디언 사냥을 위해 영국의 마스티프종 맹견을 길렀다.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몸무게가 150파운드나 나가는 마스티프를 풀어 놓아 곰과 황소를 물어뜯게 하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인디언을 물어뜯게 하는 것은 합법이었다. 버지니아 회사의 기록 중 1624년에 쓰여진 한 편지는 인디언 정복계획을 약술하면서 사냥개의 효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무력을 사용하거나 기습공격을 하거나, 농작물, 보트, 카누, 집을 불태우거나 파괴하고, 낚시 도구를 못 쓰게 만들고, 주요 겨울 양식인 사냥감을 덮치거나, 말로 이들을 추적하거나, 사냥개로 쫓아 그들의 벌거벗은 검게 탄 몸뚱이를 물어뜯어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도록 할 수도 있다. 사냥개들은 너무나 난폭하게 공격을 하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사냥개를 자신들이 숭배하는 악마보다 더 두려워 했으며, 자신들의 악마보다 더 나쁜 새로운 악마라고 생각했다.”(Beatty 2002)

 이런 인디언 사냥법에 대해 백인 성직자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1703년 매사추세츠의 목사 솔로먼 스토더드의 주장에 따르면, “만약 인디언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동하고 일반적인 국가들과 비슷하게 전쟁을 한다면, 이런 방식으로 그들을 추격하는 것은 비인도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지막지한 도둑이고 또 살인자이며 전쟁을 선포하지 않은 채 전투하는 야만인이다. 그들의 행위는 늑대와 같으니 늑대처럼 다루어야 한다.”

 그런 사냥법으로도 부족했던지 인디언 통제수단으로 ‘머리가죽 상금’이라는 게 등장했다. 원래 네덜란드인이 창안한 이 방법은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벗겨오는 사람에게 돈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머리가죽 벗기기의 원조는 인디언이라곤 하지만, 백인들의 인디언 머리가죽 벗기기는 수지맞는 장사로 발전했다. 1703년 식민지 입법회의는 인디언 머리가죽 한 장과 포로 한 명에 40 파운드의 상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후 상금은 계속 인상돼 1703년 개당 12파운드에 팔렸던 머리가죽은 1720년 100 파운드로 가격이 폭등했다. 식민지 중에서 가장 관대하고 진보적이라는 펜실베니아에서까지 머리가죽은 상당한 가격으로 팔려 나갔다.

 1755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한 수 더떠 인디언 사냥 직전에 개를 가두어두도록 권했다. “개들은 갇혀 있기 때문에 껑충껑충 뛰며 날뛸 것이고, 그렇게 약을 올린 다음 풀어 놓으면 적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서 한층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라는 이유에서였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 이후 인디언들의 입지는 더욱 위축되었는데, 프랭클린은 1763년 인디언 머리가죽 상금안을 승인해주도록 펜실베니아 의회에 압력을 넣기까지 했다.

 1750년대 캐롤라이나에는 흑인 노예들이 4만명, 인디언들은 6만명으로 2만5천명의 백인보다 훨씬 많았지만, 백인을 전혀 당해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진․스테포프(Zinn & Stefoff 2008)에 따르면, “식민지 권력자들은 흑인들과 인디언들이 서로 반목하도록 조장했다. 탈출한 흑인 노예를 돌려보내 달라고 인디언들을 매수했으며, 자유를 얻은 흑인 노예들이 인디언 지역으로 다니지 못하게 법률로 제정해 놓았다. 탈출한 노예들이 인디언 마을에 수백명이나 숨어 있었는데도 대규모로 흑인들과 인디언들이 단합하는 일은 없었다.”

 인디언끼리의 단합도 쉽지 않았다. 똑같이 인디언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1천개도 넘는 별개의 인디언 사회들이 존재해 이들이 단합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백인들로부터 공급된 술도 인디언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김학민(2009)은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온 백인들은 오드비(유럽의 독한 증류주), 럼과 같은 독이 발린 선물로 원주민들의 씨를 말려가고 있었다”며 이렇게 말한다.

 “원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짐승 가죽을 내다팔아 술을 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짐승 가죽을 얻기 위해 사냥하는 백인을 돕는 대가로 증류주를 받는 원주민도 나타났다. 원주민들에게 술의 자유를! 그런데 그 결과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알코올중독 비율은 백인의 2배에 달하고 있고, 독립 당시 12%를 차지했던 인구가 현재 0.2%인 것이 ‘의도하지 않은 진실’인 것이다.”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온지 150여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그들에게 인디언이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백인들에게 인디언은 단지 귀찮고 제거해야만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제 인디언들에겐 더욱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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