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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년)

지식사전/논술사전: 카 | 2009/09/26 20:12 | Reported By 선샤인뉴스

[선샤인 논술사전]

현 아메리카 대륙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기원전 4만년 전부터 몽고계 아시아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미국 학자 알렉스 흐들리카(Alex Hrdicka)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1만5천년경 제4빙하기엔 바닷물의 높이가 100미터 이상 낮아져 시베리아와 알래스카가 육지로 연결되었던 때가 있었으며, 이때 몽골 계통의 북부 아시아인들이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집단 이주하여 점차 남하했다. 실제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거리는 채 100킬로미터도 되지 않으며 수심도 60미터 이내이다. 또한 중간에 세 개의 섬이 있어서 카누를 타고 횡단하기에도 어려움이 없다. 그리하여 15세기 말 아메리카 대륙엔 북미에 4백만명, 남미에 1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과 만난 건 10세기 경이다. 985년경 스칸디나비아의 탐험가 비아르니 헤리울프손(Biarni Heriulfson)을 비롯하여 여러 바이킹 무리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딛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미국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바이킹들은 어쩌면 최초로 아메리카에 정착한 유럽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험악한 바다를 건너서 이룩한 그들의 정착은 육체적인 용감한 행위였지 정신적인 그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아메리카에서 행한 것들은 그들 자신의 또는 그밖의 다른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14세기 초에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를 비롯하여 여러 모험가들의 동양 탐험이 이루어지면서, 카타이(Cathay: 중국)가 갖고 있다는 풍요에 군침을 흘렸다. 이 욕망은 십자군의 귀환과 함께 유럽과 동방의 육상교역로가 열리면서 더욱 커졌지만,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족에게 함락되자 지중해 유럽의 경제적 생명줄이었던 항료 루트가 막히게 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새로운 미각에 눈을 떴기 때문에 향료는 금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케네스 데이비스(Kenneth C. Dav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 세기 동안 집에서 조리한 사슴고기만 먹던 이들은 동방의 새로운 향료가 첨가된 음식 맛을 보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실론산 계피, 인도와 인도네시아산 후추, 셀레베스(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 섬)의 육두구, 몰루카 제도의 정향(丁香) 등이 그들이 맛본 새로운 향료들이었다. 그 외에도 이들은 일본산 비단, 인도산 면직물과 염료 그리고 보석에 대한 취향도 개발시켰다.”

여기에 15세기에 엄청난 인구 증가가 이루어져 유럽인들은 신세계 정복 의지를 불태웠다. 포르투칼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1486년 바돌로뮤 디아스(Bartholomeu Diaz)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돈 이래로 여러 포르투칼 탐험가들이 신세계에 대한 도전을 감행했다.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태어나 포르투칼에서 선원생활을 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도 그런 탐험가 중의 한 명이었다.

콜럼버스는 여러 해 동안 포르투칼, 스페인(에스파냐), 프랑스, 영국의 왕들을 찾아다니면서 후원을 요청했지만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때마침 스페인의 강력한 두 지도자였던 아라곤의 페르디난드(Ferdinand of Aragon)와 카스틸의 이사벨라(Isabella of Castile)의 결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를 탄생시켰고, 그들은 새로운 교역을 위한 모험을 후원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후원을 받아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90명의 선원과 3척의 배(니나, 핀타, 산타 마리아)로 대서양을 향해 서진했다. 기함(旗艦)은 산타마리아호였다. 그는 탐험에서 얻는 이득의 10%, 새로 발견될 지역의 총독직, 그리고 바다의 제독이라는 직책을 약속받았다.

지구는 둥글다는 건 항해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미 상식이 된 사실이었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시작하던 해에 뉘른베르크의 한 지리학자는 최초의 지구의(地球儀)를 만들었다. 콜럼버스는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하면 동양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중국과 인도 제도로 통하는 직항로였다. 그는 북위 28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마르코 폴로의 그 전설적인 지판구(Cipangu: 일본)가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는 거리상으론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가 2천4백마일로 알고 있던 항로는 비행기로도 1만600마일에 이르는 거리였다.

콜럼버스와 같은 탐험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을 두려워하는 선원들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그런 통제의 일환으로 그는 항해일지를 거짓 기재하였다. 항해 거리가 길면 선원들이 겁을 먹고 실망을 해 반란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항해를 시작한 지 70일만인 10월 12일 새벽 2시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스페인으로 돌아가자고 콜럼버스를 막 위협하려는 찰나에 한 선원이 육지를 발견했다. 카리브해의 바하마 제도에 속한 섬이었다.

콜럼버스는 육지를 처음 발견하는 자에게 큰 상금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햇었지만, 그 육지에 어른거린 달빛은 전날 밤 자기가 본 것이라고 우기며 상금을 착복했다. 그는 원주민들이 과나하니로 부르는 그 육지를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로 명명했다. 그리고 그곳에 나비다드(Navidad: 성탄절)라는 성채를 구축했는데, 이는 아메리카에 세워진 최초의 유럽 거점지였다. 콜럼버스가 처음 만난 원주민은 바하마 제도의 아라와크족(Arawaks)이었는데, 그는 항해일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우리에게 앵무새, 솜뭉치, 창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와서 유리구슬이나 방울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바꾸었다.…그들은 체격이 좋고 용모가 수려한 건장한 사람들이었다.…무기를 알지 못하는 비무장 상태인 그들에게 칼을 보여주자 그게 뭔지도 몰랐던 그들은 칼날을 쥐다가 다치기까지 했다. 철(鐵)을 사용하지 않았던 그들은 등나무로 창을 만들었다.…그들은 좋은 노예가 될 것이었다. 우리는 50명의 병사만으로 그들을 정복하여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아시아의 어느 섬에 도착했다고 믿었다. 이어 그는 쿠바와 또 하나의 커다란 섬에 도착해 그곳을 에스파뇰라(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라 불렀는데, 이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중국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쿠바가 섬인지도 몰랐다. 콜럼버스가 이렇듯 서쪽으로 항해해서 처음 도착했던 섬들을 ‘서인도제도’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업적을 증명하기 위해 몇 명의 원주민들을 잡아서 데리고 1493년 3월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스페인의 군주들은 그를 성대히 맞아주었다. 그들은 교황을 압박하기로 작정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한다는 그럴 듯한 구실 아래 새로 발견한 땅의 소유권을 자신들 앞으로 해줄 것을 교황에게 간청했고, 이에 교황도 동의했다. 그러자 포르투칼이 반발했고 두 나라 사이에서 신세계를 둘러싼 이권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에서 브라질 지역이 포르투칼에 편입되었는데, 오늘날 중남미에서 브라질만이 포르투칼어를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콜럼버스는 1년후 다시 탐사를 떠났다. 이 두 번째 항해엔 배 17척과 선원 1천5백명을 제공받는 등 이전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커졌다. 그는 에스파뇰라에서 타이노족 인디언들을 금찾는 부역작업에 동원했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그는 무리한 할당량을 정해놓고 그것을 채우지 못하면 가혹한 형벌에 처했다. 팔 하나를 잃으면 운이 좋은 편이었고 운이 나쁘면 열세명씩 한줄로 세워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한 명은 예수, 나머지 열두 명은 예수의 제자를 의미했다.”

인디언들에게 더 큰 재앙은 질병이었다. 면역력이 없는 그들은 콜럼버스 일행이 들여온 전염병에 걸려 쓰러지기 시작했다. 금을 찾지 못하자 금을 대신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콜럼버스는 노예사냥에 나섰다. 스페인으로 이송할 500명의 노예를 포획했는데, 그 가운데 200명은 항해중에 죽었고 나머지는 스페인에 도착해 한 지역 교회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늘 종교적인 말을 많이 했던 콜럼버스는 나중에 이렇게 기록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잘 팔릴 만한 노예들을 계속해서 공급해주자.” 스페인으로 붙잡혀가지 않은 인디언들도 자기가 살던 지역에서 노예로 전락해 무자비한 학대를 받았다. 아이티에는 약 25만명의 인디언이 살고 있었지만 2년후 절반으로, 1550년경엔 5만명, 그리고 오늘날엔 씨가 완전히 말라버렸다. 그들에게 콜럼버스는 재앙 그 자체였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아 콜럼버스의 평판은 추락했다. 그가 1498년 5월 30일 세 번째 항해에 나섰을 때엔 배도 6척으로 줄었고, 선원 지원도 어려워 부족한 선원을 사면된 죄수들로 보충했다. 이번엔 남쪽으로 항해해 지금의 베네수엘라 해안에 닿았다. 세 번째 항해에서 그가 최초로 발견한 섬은 트리니다드 섬(Trinidad)인데, 그는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를 기념하여 이 섬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이미 앞서 보았듯이, 그가 붙인 지명들은 거의 예외없이 기독교적 이름이었다. 그의 깊은 신앙심 때문이었다나.

그러나 콜럼버스의 신은 콜럼버스를 더 이상 돌보지 않았다. 선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그를 족쇄에 채워 스페인으로 보내버렸다. 그는 스페인에서 기존 직책을 거의 박탈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었지만, 다시 불굴의 의지로 1502년 배 네 척과 열네살된 아들 페르디난도를 데리고 네 번째 항해에 나섰다. 그는 파나마 지협에 닿았지만 지친데다 말라리아까지 걸려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메이카로 향했다. 거기서 1년을 빈둥거리며 지내다 1504년 11월 스페인에 도착했다. 그 사이에 콜럼버스의 후원자였던 이사벨은 죽었고, 페르디난드는 콜럼버스에게 은퇴를 종용했다. 그는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다가 1506년 5월 20일 사망했다. 콜럼버스는 네 번의 항해를 했음에도 현재의 미국 본토에는 닿지 못했다. 케네스 데이비스는 “하지만 그의 카리브해 도착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정복, 식민지화로 이어지는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놀라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콜럼버스가 불굴의 용기, 끈기, 항해술로 역사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교과서들은 그의 다른 면들을 보여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적당히 얼버무린다. 콜럼버스의 카리브 해 도착은 놀라운 업적이었던 것만큼이나 인류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사건들의 출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황금을 찾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원주민들을 재빨리 노예화했다. 콜럼버스를 비롯한 에스파냐의 모험가들, 그 이후엔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주도한 바야흐로 학살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은 전쟁, 강제 노역, 가혹한 형벌, 유럽에서 온 질병들로 황폐화되었다.”

콜럼버스의 항해 기간중 포르투칼의 탐험가들도 여러 기록을 남겼다. 1497-98년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24)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까지 항해했고, 1500년 페드로 카브랄(Pedro Cabral)의 지휘하에 또 다른 배가 인도를 향해 출항했으나 바람에 밀려 우연히 브라질에 도착했다.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이름을 탄생케 한 영광도 포르투칼 탐사선의 승객으로 신세계를 탐험하면서 자신이 방문한 지역을 생생하게 기술했던 플로렌스 상인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에게 돌아갔다.

베스푸치는 1499년 5월 18일 콜럼버스의 선장 들의 한 사람인 알론소 데 오헤다(Alonso de Ojeda)와 함께 남아메리카 항해길에 올라 아마존 강 입구에 도달했다. 그는 거기서 다시 브라질 해안을 끼고 세 번의 항해를 더 감행했다. 그는 『신대륙(Mundus Novus)』라는 여행일지를 출판했는데, 그의 항해는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더 유명하게 알려졌다. 몇 년 뒤 프톨레마이오스의 최신판 『지리학』에 이 새로운 땅은 베스푸치를 기념해 ‘아메리카’로 표기되었다. 베스푸치가 완전히 날조된 1497년 항해 보고서에서 자신이 콜럼버스보다 더 빨리 아메리카 본토를 발견했다고 거짓 기록했기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랠프 왈도 에머슨은 “베스푸치는 세빌리아의 절인 배추 상인이었다. 이렇게 온 세상을 속여 콜럼버스의 공로를 훔쳐감으로써 세계의 절반에 자신의 부정직한 이름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사무엘 엘리엇 모리슨은 “자, 아메리고, 축배를 들자. 당신은 거짓말쟁이지만 대서양 횡단 항해를 세 번씩이나 했고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써서 기록으로 남겼다. 또 당신의 카드를 아주 교묘하게 뒤섞어서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당신이 없었다면 아메리카 발견의 역사는 몹시 빈약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베스푸치가 훌륭한 항해가였으며, 뭘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욕되게 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콜럼버스의 이름은 대륙의 이름은 놓쳤지만 남미의 콜럼비아, 캐나다 서부의 주인 ‘브리티시 콜럼비아’, 그리고 여러 도시 등의 지명으로 남았다. 어디 그뿐인가. 문인들은 앞다투어 콜럼버스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그를 미화했다. 그 대표적 문인이 미국의 유명 소설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이다. 그는 1828년 『콜럼버스의 항해와 생애』, 1831년 『콜럼버스의 항해와 발견』 등의 책을 통해 콜럼버스 신화 구축의 초석을 놓았다.

그 신화는 이른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다. ‘크리스토퍼’는 ‘그리스도를 지닌 자’라는 뜻인데, 미국인들은 실제로 콜럼버스를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발견’했다고 우기는 유럽․미국인들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인류 역사가 유럽․미국 중심으로 돌아가다보니 그렇게 떼를 쓴 게 오랫동안 먹혀왔다. 유럽․미국인들은 10월 12일을 ‘콜럼버스 기념일’로 삼았다. 미국과 스페인은 물론 아메리카대륙의 모든 국가들에서 국경일로 지정돼 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국적을 놓고 서로 우기는 경쟁마저 벌이고 있다. 1992년 10월 12일 ‘신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일’은 이 모든 나라들에서 떠들썩한 잔치판이 벌어졌으며,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선 5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계 올림픽이 열렸다. 사후 콜럼버스의 유해는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현재의 도미니카공화국)로 옮겨졌는데, 다시 쿠바로 옮겨졌다는 설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설도 있어 과학자들은 콜럼버스 유골에 대한 DNA 검사를 허가 받으려고 노력 중이다.

(참고문헌) 앨런 브링클리(Alan Brinkley), 황혜성 외 공역, 『미국인의 역사 1』(비봉출판사, 1998); 송기도, 『콜럼버스에서 룰라까지: 중남미의 재발견』(개마고원, 2003); 다니엘 J.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 이성범 옮김, 『발견자들 I』(범양사출판부, 1986); 케네스 데이비스(Kenneth C. Davis), 이순호 옮김,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책과함께, 2004); 하워드 진(Howard Zinn)․레베카 스테포프(Rebecca Stefoff), 김영진 옮김,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추수밭, 2008); Richard Shenkman(리처드 솅크먼), 이종인 옮김, 『미국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미래M&B, 2003); 함용도, 『워싱턴 어빙: 생애와 작품세계』(건국대학교출판부,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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