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수십만명을 처형한 유럽의 ‘마녀 사냥’

 “퓨리터니즘을 어느 정도, 그것도 그 원천에서 이해하지 않고는 미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정만득 2001). 1692년에 벌어진 세일럼의 ‘마녀 사냥’도 그런 이해의 차원에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에도 미국에선 형식을 달리한 ‘마녀 사냥’이 자주 벌어지기 때문이다.

 유럽 전역에서 마녀사냥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는 1585년-1635년 사이의 약 50년 동안이었으며, 마녀사냥으로 처형된 희생자의 수에 대해선 최소 50만명에서 최대 9백만명으로 역사가들마다 견해가 다양하다. ‘마녀 사냥’에 대한 이해를 위해 앞서 거론한 바 있는 룬(Loon 2005)을 다시 불러내보자. 그는 역사적으로 최악의 불관용은 교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시종일관 고발하고 있다. 그는 중세의 이단자들은 거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며, 그 대표적 사례로 마니교도를 든다.

 “중세의 일등 그리스도인에게 마니교도는 아주 못마땅한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확실한 죄목을 걸어 재판에 부치기가 어렵자 그들은 풍문에 근거해 그들을 처단했다. 이 방법은 극적이지도 않고 진행도 엄청나게 더딘 정식 법정에 비해 분명히 이점이 있었지만, 때론 증거가 불충분한 경우도 있어서 수많은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이런 해결책은 불쌍한 마니교도들의 경우 더욱 억울한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 종파의 창시자인 페르시아인 마니(Mani, 216-277)가 선행과 자비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마녀사냥

마녀사냥


 뒤이어 나타난 ‘마녀 사냥’을 지휘한 교황청 소속의 이단 법정은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에서 갈릴레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을 희생자로 만들었다. 룬은 “바위투성이 성곽의 캄캄한 굴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끔찍한 운명보다는 화형목에서 불타 죽는 게 낫기에, 많은 죄수들이 차라리 이단으로 선고받아 비참함에서 벗어나려고 짓지도 않은 온갖 죄를 고백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세계 각지에서 500년 넘게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는 건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수많은 순진한 사람들이 어떤 말 많은 이웃이 속삭거린 소문 때문에 어느날 밤 갑자기 잠자리에서 끌려갔다는 것, 이름도 자격도 알지 못하는 판사 앞에 나아갈 날을 기다리며 지저분한 감방에서 몇 달 몇 년을 보냈다는 것, 자기가 무슨 죄로 그곳에 와 있는지 한 번도 들은 바가 없었다는 것, 그들의 죄를 일러바친 이가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었다는 것, 친척과 이야기를 할 수도 변호사와 상의할 수도 없었다는 것, 죄가 없다고 계속 주장하면 사지가 다 부러질 때까지 고문을 받기도 했다는 것, 다른 피고의 죄에 대해 증언하는 건 이단에게도 허용되었지만 다른 피고에게 유리한 얘기를 하려면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어떤 이유에서 그런 비참한 신세가 됐는지 감도 잡지 못한 채 죽는 일도 있었다는 것. 50년, 60년씩 묻혀 있던 시체를 무덤에서 파내고,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난 사람에게 ‘궐석’ 재판으로 유죄를 선고하고는 그의 상속인들에게서 모든 재산을 빼앗은 일은 더더욱 믿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게 다 사실이었다. 이단 심문관들은 몰수 자산으로 자유롭게 활동 경비를 충당했던 까닭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았고, 두 세대 전에 할아버지가 지었다는 죄 때문에 거지로 내몰리는 손자들이 숱했다.”

 마녀 사냥꾼의 활약

 그렇게 집단적으로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단을 고발하는 첩자들이 없을 리 없었다. 13-15세기에 유럽은 단독으로 활동하는 사악한 첩자들로 들끓었으며, 이들은 교회를 비난했다거나 어떤 교의에 의문을 표했다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일로 먹고 살았다고 한다.

 “주변에 이단이 없으면 만들어내는 것이 앞잡이 공작원의 일이었다. 아무리 죄 없는 사람이라도 고문이 죄를 자백하게 만들 터이므로, 그들은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이 끝없이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영적인 결함이 의심되는 사람을 익명으로 고발할 수 있는 제도로 말미암아 많은 나라에 그야말로 공포 시대가 열렸다. 드디어는 가장 가깝고 친한 친구조차 믿지 못하게 되었다. 한 집안 사람들마저 서로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단 심문 법정에서 많은 일을 담당한 탁발승들은 이 방식이 불러온 공포 분위기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거의 두 세기 동안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그렇다. 종교개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들 중 하나는 많은 사람이 탁발승이라는 오만한 거지들에 대해 넌더리를 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경건한 사람입네 하며 선량한 시민들 집에 함부로 쳐들어갔고, 가장 포근한 침대에서 잤으며, 최고로 맛난 음식을 먹었고, 귀한 손님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들이 이미 자기들 몫이라 여기게 된 갖가지 호사 중 어느 하나라도 못 누리게 될 경우 그간의 은인을 이단 법정에 고발하겠다는 위협만으로 편안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유럽에서 마녀 사냥은 15세기 초엽에서 18세가 말엽까지 약 400여년동안 지속되었는데, 이 사냥의 총지휘자는 교황이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1484년 전염병과 폭풍이 마녀의 짓이라는 교서를 내린데 이어, 1488년 칙령에서 모든 나라에 마녀사냥 심문관을 임명하고 기소․처벌할 권한을 주었다. 행여 사탄에 대한 적개심이 식을까 두려워 후임 교황들은 새로운 마녀사냥 위원회를 구성하곤 했다.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1494년에, 레오 10세는 1521년에, 아드리안 6세는 1522년에 마녀사냥 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에게 마녀를 색출하고 처형할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영국에선 1541년 마녀를 처벌하는 구체적인 법령이 처음으로 공포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마녀 처형은 이루어졌다. 이후 1551년, 1562년, 1604년에 마녀 처형에 관한 더욱 엄격한 법이 제정되었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마녀 처형은 1716년에 일어났지만 마녀들에 대한 재판은 1736년까지 지속되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기에 맹활약을 한 마녀 사냥꾼의 주요 마녀 감별법은 용의자를 물에 던지는 것이었다. 마녀 용의자의 팔다리를 묶고 담요에 말아 연못이나 강에 던져 가라앉으면 가족에게 무죄라고 위로하면 그만이었고 물에 뜨면 마녀라는 증거이므로 화형에 처해졌다.

 19명을 처형한 세일럼의 ‘마녀 사냥’

 그런데 왜 그런 마녀 사냥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메리카에서까지 나타난 것일까? 왜 청교도들은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하는 ‘두 얼굴’을 보이게 된 것일까? 이미 1607년부터 puritanical(청교도적인)은 엄격하고 완고하고 매우 도덕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누가 이 용어를 만들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당시 영국 국교회 지도자들이 ‘혼자만 깨끗한 체하는 사람들’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붙여준 사회적 낙인(烙印)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더하여 퓨리타니즘(puritanism)은 거의 절대적인 남자의 권한과 더불어 여성의 연약함과 열등함을 강조한 이데올로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기 퓨리탄 사회는 매우 긴밀하게 짜여진 유기체로서 엄격한 가부장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인구가 늘고 상업화가 진전되면서 사회변화와 그에 따른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었다. 청교도들은 아주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일이 생기면 의혹을 품고 신속하게 처벌하려는 열의를 불태웠다. 그들은 사탄의 힘을 믿었고, 사탄이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마녀 사냥이다.
 1651년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에 사는 휴 파슨스(Hugh Parsons)의 아내는 남편이 “온 집안에 완두콩을 집어던지고는 내게 주우라고 시키고” 가끔 잠을 자다가 “끔찍한 소음”을 낸다며 불평했다. 그러자 마을 원로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요술을 부린다는 이유로 그 남편을 가까운 교수대에서 처형시키기로 결정했다. 코네티컷 뉴헤이븐의 어느 마을에 눈이 하나뿐인 돼지가 태어나자 치안판사들은 원인 규명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애꾸눈 조지 스펜서(George Spencer)를 만나자 그를 추궁하였다. 스펜서는 강요에 못이겨 수간(獸姦)을 했다고 털어놓았다가 나중에 자백을 취소했다. 코네티컷 법에서는 수간을 입증하려면 두 명의 증인이 필요했다. 그를 교수형에 처하고 싶어 안달이 난 치안판사들은 돼지와 그가 철회한 고백을 두 사람의 목격자로 인정해 그를 교수형에 처했다.

 이런 해괴한 사건들은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일어났으나 가장 유명한 게 바로 매사추세츠 세일럼(Salem) 마을에서 일어난 마녀 사냥이다. 세일럼 마을은 1672년 교역 도시로 번영을 누리던 도시 세일럼에 있는 교회에 가지 않고 그들만의 교회에 다니고 싶어하는 일군의 농부 가족들이 건설한 공동체였다. 이 마을은 목사 문제로 수년간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1689년 전직 상인이며 하바드 대학 중퇴자인 새무얼 패리스(Samuel Parris)가 목사로 초청됐지만 분란을 잠재우지 못하고 혼란 상태에 빠져 들었다.

 1692년 1월 아홉 살 난 목사의 딸 베티와 열한 살 난 목사의 조카 아비게일 그리고 열두 살 난 마을 유지의 딸 앤 푸트남이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 소녀들이 마법에 걸려 ‘악마의 손’ 안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이상한 행동을 보인 소녀들은 부두교(Voodoo) 가르침에 열중하고 있는 몇 명의 서인도제도 출신 하녀들을 마녀라고 고발했다. 소녀들에게 점쟁이 놀이를 가르쳤던 패리스 가족의 노예인 인디언 티투바(Tituba)가 의심을 받았다. 티투바, 마을 여인 사라 굿과 사라 오스번이 2월 29일 마녀 혐의로 체포돼 투옥되었다. 이들이 투옥된 후 수많은 사람들이 기소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세 소녀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전역은 공포에 휩싸였다. 총독 윌리엄 핍스(William Phips)는 특별 법정을 소집하여 150명 이상의 주민(대다수가 여성)을 마녀 혐의로 기소했다.

 마녀 고발을 시작했던 소녀들은 후에 자기들의 주장을 취소하고 자기들의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라고 말했지만 재판은 계속되었다. 결백을 주장하면 교수형을 당하고, 자백 하면 교수형을 모면할 수 있었다. 사탄의 꼬임에 빠진 사람은 자백함으로써 사탄의 이용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가정에 따른 것이었다. 겁에 질린 피고들은 빗자루를 타고 다녔다든가 악마와 섹스를 했다는 등 되는 대로 자백을 했다.

 1692년에 마지막 마녀 재판이 있기까지 살렘의 주민 중 28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5명은 죄를 자백하여 목숨을 건졌고, 2명은 도망쳤고, 임신부 1명은 사면되었지만, 모두 19명이 처형되었다. 유죄를 인정하지 않은 어떤 마녀의 남편은 돌덩어리에 짓눌려 질식사했다. 총독 핍스는 뒤늦게 마녀재판의 중지를 명했지만, 마녀 죄를 의심 받고 있던 자신의 아내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의심을 받았다.

 마법은 LSD 중독?

영화 '주홍글씨'의 포스터

영화 '주홍글씨'의 포스터

 마녀 사냥은 세일럼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다른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고발된 마녀들은 대부분 중년 여자들로 자식이 없는 과부였다. 사회적 신분이 낮고, 가정에 문제가 있고, 다른 죄가 있다고 자주 고발당하고, 이웃들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퓨리탄 규범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 게 문제였다. 데이비스(Davis 2004)는 여러 지역에서 “마법을 부린 죄는 곧 부락의 분규를 잠재우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건으로 뉴잉글랜드 청교도 정신의 편협성과 독실함을 가장한 경직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또한 미국 헌법의 초안자들이 끝까지 막으려고 한 교회 국가의 위험성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지역 사회 전체가 광기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한 일은 미국사에서 뉴잉글랜드나 식민지의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 비겁한 도덕성을 드러낸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훗날 이 사건에 대한 과학자들의 해석이 흥미롭다. 행동심리학자 린다 카포릴은 소녀들의 행동을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 환각제) 사용자들의 행동과 연관시켰다. 당시 LSD는 없었지만 호밀에 생기는 것으로 LSD의 천연연료가 되는 버섯 종류인 맥각곰팡이는 있었다는 것이다. 독극물 연구자들에 따르면 맥각곰팡이에 오염된 식품은 경련, 망상, 환각 그리고 세일럼 재판기록에도 나와있는 다양한 증상들을 유발시킨다. 당시 호밀을 세일럼의 주산물이었고 ‘마녀들’은 곰팡이가 번식하기좋은 습한 목초지에 살고 있었다. 프랜시스 힐(Frances Hill)은 의학적 설명을 제시했는데, 소녀들의 행동을 ‘히스테리아’로 보았다. “이상한 몸의 자세, 알 수 없는 고통, 귀울림, 언어 장애, 실명, 뜻 모를 재잘거림, 거식증, 타인에 대한 파괴적인 행위와 자기 파괴적인 행위 등은 세 소녀 모두에게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Davis 2004)

 훗날 아서 밀러의 희곡 『크루서블(The Crucible)』(1952)은 세일럼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작품으로 1996년 위노나 라이더(Winona Ryder), 다니엘 데이루이스(Daniel Day-Lewis)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크루서블』은 당시 미국 사회를 휩쓸던 매카시 선풍(공산당 사냥 바람)을 ‘현대판 마녀 사냥’으로 고발한 작품이다.

 세일럼 사건 당시 청교도 목사 인크리스 매더(Increase Mather, 1639-1723)는 악마가 마녀로 나타나 뉴잉글랜드의 낙원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아들 코튼 매더(Cotton Mather, 1663-1728)는 마녀로 낙인 찍힌 여자들을 집으로 끌고 와서, 그가 발견했다고 하는 끔찍한 사실들을 폭로하는 데에 앞장섰다. 매더 부자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들은 이들에 대한 신속한 재판과 가혹한 처벌을 요구했다.

 세월이 약이런가. 매더 부자는 이 사건 이후 뭘 느낀 게 있었던 것인지 미신을 버리고 과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들은 뉴잉글랜드가 선택된 나라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경험적 증거들을 수집하고 과거를 선민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코튼 매더의 『기독교 철학자(The Christian Philosopher)』(1721)는 과학혁명의 아메리카적 수용을 가장 잘 보여준 저서다. 그는 과학이 종교에 어떤 위협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으며, 뉴턴을 “지성 세계의 영원한 독재자”로 찬양했다.

 청교도는 섹스에 매우 관대했다?

 당시의 청교도를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의외의 모습도 드러난다. 세간의 상식과는 달리 청교도는 섹스에 매우 관대했다는 주장이 있다. 간통을 시인한 사람이 교회의 임원으로 계속 활동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청교도의 또다른 ‘두 얼굴’인 셈이다. 나사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1850)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웬 말이냐”고 반문하겠지만, 『주홍글씨』의 주인공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s)이 겪었던 것처럼 A문자(Adultery: 간통)를 달고 다녀야 하는 시련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A문자를 달고 다녀야 했던 게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다. 1636년 뉴플리머스 공동체는 간통한 사람에게 두개의 대문자, 즉 AD라고 새겨진 헝겊을 상의 윗부분이 꿰매고 다니게 한 법령을 제정했다. AD는 간통녀(adulteress)의 약자였다. 호손이 소설 속에서 이를 A자로 바꾼 것일뿐, 원래는 간통녀에게 AD라는 두 글자를 달고 다니게 했다.

 이 소설은 1995년 로랑 조페(Roland Joffe) 감독, 데미 무어(Demi Moore) 주연으로 영화 『주홍글씨』로 만들어졌다. 김성곤(1997a)은 이 영화의 사실주의적인 영상미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긍정 평가하면서도, 조페가 “강인한 여성의 ‘홀로서기’”라는 원작의 주제를 모독하면서 “감상적인 애정영화로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1700년대엔 약혼중인 남녀가 판자나 베개로 선을 그어놓고 옷을 입은 채로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번들링(bundling) 또는 태링(tarrying)이 성행했는데, 이는 종종 성관계로 이어졌고 원치 않는 아이를 나게 되는 원인이 되엇다. 그럼에도 이 관습은 널리 퍼져 있었다. 로드아일랜드 브리스톨에서는 1720년과 1740년 사이에 임산부의 약 10%는 결혼한지 8개월 이내에 첫 아기를 낳았고, 그후 20년 동안에는 신혼부부의 약 50%는 결혼한지 9개월이 되기 전에 출산했다. 매사추세츠의 점잖은 마을인 콩코드에서 독립전쟁 전 20년 사이에 태어난 아기의 3분의 1은 사생아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청교도 가족이 현대의 미국 가족보다 섹스에 대해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청교도는 섹스에 매우 관대했다는 주장은 메이플라워호의 필그림들이 도착한지 반세기만에 보스턴은 ‘창녀로 가득’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1699년부터 1779년까지 버지니아의 주도였던 월리엄스버그에는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매춘굴이 3개나 있었다. 청교도는 성행위를 식사만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고 대수롭지 않게 화제에 올렸다. 혼전 성관계가 권장되었으며, 결혼을 하려는 남녀는 precontract 곧 성관계를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간음은 공개적으로 장려되진 않았지만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사이에서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1770년대에는 뉴잉글랜드 여성의 절반이 임신한 상태에서 결혼했으며, 특히 시골 지역에서는 신부의 94%가 임신을 한 몸으로 결혼했다. 18세기가 끝날 무렵에서야 성행위에 대한 태도가 억압적인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공식적인 태도가 그랬다는 것일 뿐이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 문화는 인간이 사는 어느 사회에서건 나타나는 것이지만, 아메리카 식민지와 훗날의 미국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 세계 국가들 중 가장 종교적이면서도 가장 실용적인, 얼른 보기엔 화합할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특성을 평화공존시키는 것이야말로 미국사회의 저력이 아닐까?

<참고문헌>
앨런 브링클리(Alan Brinkley), 황혜성 외 공역, 『미국인의 역사(전3권)』(비봉출판사, 1998).
빌 브라이슨(Bill Bryson), 정경옥 옮김,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산책: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살림, 2009).
존 B. 베리(John Bagnell Bury), 박홍규 옮김, 『사상의 자유의 역사』(바오, 2006).
케네스 데이비스(Kenneth C. Davis), 이순호 옮김,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책과함께, 2004).
데보라 G. 펠더(Deborah G. Felder), 송정희 옮김, 『세계사를 바꾼 여성들』(에디터, 1998).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em van Loon), 이혜정 옮김, 『관용』(서해문집, 2005).
찰스 맥케이(Charles Mackay), 이윤섭 옮김, 『대중의 미망과 광기』(창해, 2004).
스토 퍼슨즈(Stow Persons), 이형대 옮김, 『미국지성사』(신서원, 1999).
데이비드 솅크(David Shenk), 정태석․유홍림 옮김, 『데이터 스모그』(민음사, 2000).
윈턴 U. 솔버그(Winton U. Solberg), 조지형 옮김, 『미국인의 사상과 문화』(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
김성곤, 『헐리웃: 20세기 문화의 거울』(웅진출판, 1997).
김성곤, 『문학과 영화』(민음사, 1997a).
오성근, 『마녀사냥의 역사: 불타는 여성』(미크로, 2000).
이주영, 『미국사』(대한교과서, 1995).
정만득, 『미국의 청교도 사회: 정착 초기의 역사』(비봉출판사, 2001).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copyrightⓒ선샤인뉴스. All rights reserved.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선샤인뉴스가 마음에 들면 구독+해 주세요



TRACKBACK ADDRESS : http://www.sun4in.com/trackback/3270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thdino 2009/11/03 11: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요? 난 지금까지 청교도는 성에 억압적인 종교라고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섹스에 관대한 종교라니 이거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럽네요. 과연 뭐가 진실일까요?

  2. 제발 부탁 좀 합시다. 2009/11/14 0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청교도에 대해 생긴 오해와 편견이 있는 것은 알겠는데, 너무 막 가는 것 아닌가 싶군요. 마녀사냥, 있었습니다, 그들도 2차례 있었던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그들은 회개로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주홍글씨의 경우는 어떤 극작가가 타국의 문화를 미국 풍토로 글을 옮기면서 개인적으로 청교도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그렇게 했다는 식으로 극을 올려서 그랬다더군요, 성관계의 경우는 관대했다는 것 보다, 합법적인 부부 간에 반드시 가져야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청교도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는데, 요즘 글 쓰는 것들을 보면 오해와 편견을 낳고 또 낳고, 거기에 비아냥 거리는 식과 비난하는 식의 주관적 입장을 마구 섞어서 함부로 글을 써대고, 그걸 가지고 또 참고자료라고 글들을 써대니...좀 정확히 알고 쓰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