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샤인 논술사전]
1517년 독일지역에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카톨릭에 도전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쇄술의 발명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가능했을까? 종이와 인쇄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지술은 중국 후한시대(서기 105년) 채륜이 개발했거나 개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라비아를 거쳐 12세기경 유럽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서는 신라(751년)의 무구정광다라니경 또는 당(868년)의 반야바라불경이며,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은 1373년 고려시대의 직지심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에서 활판인쇄술의 아버지로 통하고 있는 요하네스 구텐베르그(Johannes Gutenberg, 1397-1468)가 활판인쇄술로 42행 성서를 인쇄한 것은 1454년이었다. 성서가 마인츠(Mainz)에서 출판되었을 때, 성직자들은 기계로 만든 성서에 대해서는 경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초기 단계의 인쇄는 교회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유럽에서는 1480년경에 와서는 이미 111개의 도시에 인쇄기들이 있었고, 1500년에는 그 수가 238개를 넘었다.
인쇄술의 발달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해롤드 이니스(Harold Innis)에 의하면 “15세기 이후 인쇄물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급속한 성장은 구두 사회의 전통을 무너뜨렸고 서구사회의 시간을 중심으로 구성된 조직을 공간 중심의 조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종교를 바꾸어 놓았고,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의 많은 부분을 개인화했으며, 가치의 비교를 초래했고, 권위의 주체를 교회에서 국가로 이전시켰으며, 강력한 민족주의를 조성시켰다.”
캐나다 출신의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인쇄술이 미친 영향을 좀더 구체적으로 ①승려․귀족 계급의 지식 독점 종지부(부르주아 혁명의 원천) ② 내셔널리즘의 확산(프린팅을 통해 모국어를 시각적으로 이해하고 그에 따른 모국어의 표준화 그리고 교육을 통한 모국어의 보편적 대량 보급, 지도를 통해 국가를 시각적으로 이해하는 등 동일 언어, 동일 사상으로 일체화) ③ 프로테스탄티즘 가능(고립된 상황에서 생각하는 걸 가능하게 함으로써 개인적 계시를 촉진) ④ 가부장제 강화(성경의 양산으로 집에서 기도하는데 아버지가 인도) ⑤ 개인주의와 전문화(구어문화에서는 남과의 접촉을 통해서 지식을 얻지만 프린팅은 홀로 심사숙고하고 몰두할 것을 요구) 등을 지적하였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인쇄술은 그간 승려․귀족 계급만 독점하고 있던 지식, 특히 성경 지식을 일반 신자들도 공유할 수 있게 함으로써 승려․귀족 계급의 ‘말빨’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루터가 카톨릭에 도전할 당시 카톨릭 교황은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다. 전엔 그게 다 하나님의 뜻이겠거니 했지만, 이제 인쇄술 덕분에 성경을 접하게 된 신도들이 그런 사기 행각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바로 이런 변화를 근거로 루터의 도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루터의 도전이 시작된 지 3년 후인 1520년 교황이 루터를 파문하자 루터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완전히 카톨릭 교회 밖으로 인도하였다. 여기에 프랑스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활동한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인간의 행위나 교회 자체가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카톨릭 교리를 거부하는 데 있어서 루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칼뱅은 예정설(doctrine of predestination)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신에 의해 구원받도록 ‘선택’되었고 어떤 사람은 저주받게끔 예정돼 있다. 그러나 칼뱅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이 사는 방식이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보여준다고 믿었다. 즉 사악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은 징표이고, 덕망높고 근면하고 성공한 사람은 은혜를 받은 증거라는 식의 해석이었다. 칼뱅주의는 추종자들에게 불안감과 동시에 고결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한 동기를 부여했다. 칼뱅주의는 북유럽 전역에 확산돼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s)와 영국의 퓨리탄(Puritans)을 비롯한 여러 칼뱅주의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그런데 영국의 종교개혁은 종파적 반란의 결과라기보다는 왕과 교황간의 정치적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지 못한 스페인 출신 부인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에게 분노해 1529년 카톨릭교회의 유대를 끊고 자신이 기독교의 수장이 되었다. 헨리가 죽은 후 그의 딸인 카톨릭교도 메리 여왕은 영국과 로마의 유대를 복원했지만, 1558년 그녀가 죽자 그녀의 이복자매인 엘리자베드 1세가 여왕이 되었고 다시 한번 카톨릭교회와 단절했다. 이번엔 영원한 단절이었고, 이로서 새로운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가 번성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와 카톨릭교회는 별 차이가 없다고 불만을 가진 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퓨리탄이다. 이들은 교회를 정화할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특히 가톨릭적 요소를 정화(purify)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puritan’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퓨리탄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분리주의자(Separatists)로 알려진 가장 급진적인 퓨리탄들은 국법으로 규정된 성공회 교회 참석을 거부하고 독립된 종교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대다수 퓨리탄들은 영국 국교회와 결별하길 원치 않았으며 개혁을 원했다. 개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망한 이들은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개혁, 즉 개신교혁명은 관용을 가져왔는가? 그렇지 않았다.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em van Loon, 1882~1944)은 “그리스도인 개인과 신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자 했던, 그리고 지나간 시대의 모든 편견과 모든 부패를 없애고자 했던 이 위대한 개혁은 중세의 낡은 인습을 너무나 잔뜩 지고 있었던 나머지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그 결과 그것이 더없이 혐오하던 교황 체제의 완전 복사판이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단을 화형시키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짓’이라고 선언한 바 있는 바로 그 루터가 몇 년 후에는, 재세례파 사상에 물든 독일인과 네덜란드인들을 사악하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증오에 빠져 마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보인다. 인간은 인간의 논리 체계를 신께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삶의 행보를 시작한 용맹한 개혁가(칼뱅)가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논법보다 명백히 우수한 논리를 펴는 적대자를 화형시키고 있다.…마침내 어둠이 끝나고 새벽이 왔다는 새 시대를 외쳤건만, 칼뱅과 루터는 둘 다 생애 내내 결국은 철저한 중세의 아들이었다. 그들에게 관용은 미덕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 자신이 국외자였을 때 그들은 양심의 자유라는 신성한 권리를 즐겨 외치며 적들에 대한 반론에 이용했다. 그러나 일단 싸움에 이기고 나자 이 든든한 무기는, 쓸모 없다고 버려진 수많은 좋은 개념들로 이미 꽉 찬 개신교의 고물 창고 구석에 소리 없이 던져졌다.”
칼뱅은 금욕주의의 화신이었다. 스위스 제네바의 정치활동에도 관여했던 그는 소비행위를 규제하는 ‘사치금지법’을 만들기도 했다. 1564년 칼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비오(Pius) 4세는 “그 이단자의 힘은 돈에 무심한 데 있었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칼뱅은 가난하게 살다 가난하게 죽었으며, 죽던 해에는 “병 때문에 제대로 일을 못했다”며 4분기 봉급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칼뱅의 그런 특성이 더 문제였다. 1553년 10월 27일 오전 11시 스위스 제네바의 샹펠 광장에서 미겔 세르베투스가 불타는 장작 더미 위에서 그가 쓴 책들과 함께 불타 사라졌던 장면을 보자. 미리 목을 졸라 죽이거나 마취를 한 뒤 화형을 집행함으로써 고통을 줄여주는 방식도 있었건만, 세르베투스는 말짱한 정신으로 생살이 타는 고통 속에 죽어가야 했다. 이 극악한 형벌의 이유는 오직 하나, 칼뱅과 다른 성서 해석을 책으로 낸 행위 뿐이었다. 제네바를 사실상 장악한 칼뱅은 검열과 탄압으로 지식인들의 입을 봉쇄했고, 거리의 사소한 주먹다툼을 난동으로 몰아 반대파를 붙잡아 고문하고 처형했다.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지켜본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는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고 탄식했다.
2009년 7월 10일 장 칼뱅 탄생 500주년을 맞아 스위스 제네바를 비롯해 세계 도처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다. 열렬한 칼뱅주의자인 얀 페테르 발케넨데(Balkenende) 네덜란드 총리는 "현 경제위기는 탐욕, 돈에 대한 집착, 이기적 행동이 빚어낸 도덕적 위기다. 어떤 사회나 도덕적 중심이 필요하다고 한 칼뱅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마약이나 성(性)매매를 관대하게 다뤘던 네덜란드가 이들 문제를 규제하기 시작한 것도 칼뱅주의 재조명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 여론조사에서 네덜란드 여성 네명 중 한명이 남성과의 성관계 이후 "죄의식을 느낀다"고 답한 것도 금욕을 강조하는 칼뱅주의의 영향으로 해석되었다.
한국에선 불어권 발음인 ‘장 칼뱅’ 대신 ‘요한 칼빈’으로 부르는데, 칼빈을 기리는 행사가 범(汎)장로교적으로 치러졌다.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는 한국칼빈학회, 한국개혁신학회, 한국장로교신학회가 연합해 조직됐으며 27개 장로교 교단이 연합한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등이 후원했다. 기념사업회 대표회장인 이종윤 목사는 "종교개혁을 시작한 사람은 루터이지만 완성한 사람은 칼빈"이라며 "특히 장로교회는 칼빈 신학이 '공통분모'"라고 강조했다. 이 목사는 "칼빈의 예배는 '사람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 위주'였다"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강조했던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아 한국 장로교단들도 연합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칼뱅주의는 미국, 아시아로 퍼져나갔지만 루터주의는 북유럽에 전파된 게 고작이다. 그 이유에 대해 프랑스 리옹3대학의 역사학 교수 이브 크뤼므나케르는 “역사가마다 의견이 다르다. 나는 종교 자체에 내재한 이유로 보지 않는다. 칼뱅주의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큰 바다에 접해 있고 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미국으로, 네덜란드는 아시아로 진출했다. 그것이 칼뱅주의가 전 세계에 퍼진 이유다. 그러나 독일은 대양도 없고 배도 없고 따라서 식민지도 갖고 있지 못했다.”고 말한다.
헨드릭 빌렘 반 룬은 개신교 혁명이 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관용이라는 면에서 큰 기여를 했다는 건 인정한다. 직접적인 면에서 얻은 것은 참으로 작았지만 간접적으로 종교개혁은 모든 면에서 진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첫째, 그것은 사람들을 성서와 친숙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검증이 시작돼 성서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에게 성서는 더 이상 모든 참된 지혜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었다. 이렇게 자유로운 사색을 막는 장애가 없어지자, 거의 천년 동안 둑으로 막혀 있던 과학적인 연구의 물줄기가 원래의 물길로 흐르기 시작했다. 둘째, 종교개혁은 북유럽과 서유럽을 종교 조직이라는 허울 아래 로마제국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 권력의 독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다시 세워주었다.
참고문헌: 다니엘 J.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 이성범 옮김, 『발견자들 I』(범양사출판부, 1986); Wilbur Schramm & William E. Porter, 최윤희 역, 『인간커뮤니케이션』(나남, 1990); James W. Carey, <Harold Adams Innis and Marshall McLuhan>, Raymond Rosenthal ed., 『McLuhan: Pro & Con』(New York: Funk & Wagnalls, 1968); Richard Kostelanetz, <Marshall McLuhan: High Priest of the Electronic Village>, Thomas H. Ohlgren and Lynn M. Berk, eds. 『The New Languages: A Rhetorical Approach to the Mass Media and Popular Culture』(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77); Marshall McLuhan, 『The Gutenberg Galaxy: The Making of Typographic Man』(New York: Signet Book, 1969); 앨런 브링클리(Alan Brinkley), 황혜성 외 공역, 『미국인의 역사 1』(비봉출판사, 1998); 헨드릭 빌렘 반 룬(Hendrik Wilem van Loon), 이혜정 옮김, 『관용』(서해문집, 2005); 박용현, <1553년, 1930년, 2009년의 광장>, 『한겨레 21』, 제764호(2009년 6월 12일); 송평인, <금욕의 상징? 와인-고기 즐기던 ‘인간 칼뱅’ 되살려>, 『동아일보』, 2009년 7월 11일; 이태훈, <"현(現)경제위기, 칼뱅주의 잊었기 때문">, 『조선일보』, 2009년 7월 13일자; 김한수, <"칼빈은 현대사회 설계한 개혁가">, 『조선일보』, 2009년 6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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