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매사추세츠 회사의 식민사업

지식사전/논술사전: 마 | 2009/09/25 20:18 | Reported By 선샤인뉴스

[선샤인 논술사전]

1625년 제임스 1세의 사망후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가 왕위를 계승하자 퓨리탄 탄압은 더욱 악화되었다. 찰스 1세는 1629년 3월 10일 의회를 해산하고 절대군주로 군림하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퓨리탄 상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새 기업을 조직했다. 그들은 의회 해산 1주일 전 그들의 종교적 성향을 알지 못한 왕으로부터 매사추세츠 회사(Massachusetts Bay Company)를 세우고 신세계에서 식민사업을 할 수 있는 특허를 받아냈다. 1629년 그들은 상당수의 정착민을 뉴잉글랜드로 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회사의 구성원 중에는 상업적 모험이 아니라 종교적 피난처를 건설할 것을 결심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1629년 10월 20일 영국에 머물기를 선호하는 회사 주주들로부터 지분을 사들여 존 윈스롭(John Winthrop, 1588-1649)을 식민지 초대 지사로 선출했다. 윈스롭은 1630년 4월 8일 뉴잉글랜드로 향하는 항해를 총감독했다. 대부분 가족단위로 구성된 1천명의 사람들이 두 차례에 걸쳐 17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뉴잉글랜드로 향했다. 살렘(Salem) 근처에 도착후 처음 맞는 겨울 동안 거의 200명이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갈 것을 결심했지만, 제임스타운보다는 훨씬 빨리 사람이 많아지고 번성하게 되었다.(Brinkley 1998)

반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온 퓨리탄들이 살고 있는 플리머쓰의 영향력은 현저히 위축되었고, 인구는 제자리 걸음 상태를 면치 못했다. 플리머쓰는 1691년 영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매사추세츠에 병합돼 독립 식민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정착 10년후 매사추세츠 동부 지역에 찰스타운, 뉴타운(후에 캠브리지로 개명), 록스베리, 도체스터, 워터타운, 입스위치 콘코드, 서드베리 등의 마을이 건설되었으며, 찰스 강 어귀의 보스턴 항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1640년경 보스턴의 인구는 2만명으로 증가했다. 이 퓨리탄들은 플리머스 식민지 건설자인 분리주의자들과는 달리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종교적 자유를 누리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각 교회가 자기들의 목사를 선출하고 교회 일을 관장함에 따라 회중(會衆)들에 의해 운영되는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성립되었다.(Brinkley 1998) 1592년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 1550-1633)이 발표한 조합이론을 토대로 형성되었다고 해서 조합교회라고도 했다. 영국에서는 칼뱅을 따르는 장로파와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 독립파(independents)라고 불렀다.(Parker 2009)

뉴잉글랜드는 훗날의 메인, 뉴햄프셔, 버몬트,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등 6개 주를 포괄하는 지역인데, 퓨리탄들에게 뉴잉글랜드는 성서에 나오는 가나안(Canaan) 땅의 새로운 구현이 되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언제나 살아있는 성스러운 공화국(a holy commonwealth)의 수립을 소망하였으며, 죄인은 그 자신의 어떤 장점이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았다.(Persons 1999)

퓨리탄은 부패한 세계에 대해 모범이 되는 신성한 사회, 즉 ‘언덕 위의 도성(都城)’(city upon a hill)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는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5장 14절에 근거한 것이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upon a hill cannot be hidden).” 윈스롭은 자신들이 건설한 ‘언덕위의 도성’이 기독교적 사랑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이었다. 윈스롭은 상륙 후 채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탄이 우리들 가운데 힘을 뻗쳐…일부 사람들은 영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다 사악해진 것 같다”고 개탄했다.(정만득 2001)

내실이야 어찌됐건 청교도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순수함과 신성함을 강조했다. 그래서 이교도들은 영국에서 퓨리탄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1637년 존 윌라이트(John Wheelwright) 목사는 자기들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이라는 내용의 설교를 해 논란을 빚었는데, 이런 유형의 갈등은 끊임없이 일어났다.(정만득 2001) 종교는 식민지내에 여러 독립세력이 생겨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특히 메릴랜드 식민지의 종교전쟁이 주목할 만 하다. 첫 번째 볼티모어경(Lord Baltimore)인 조지 캘버트(George Calvert)는 영국 국교의 탄압을 받는 영국 카톨릭 교도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삿속으로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가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특허를 왕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협상하던 중에 죽자 두 번째 볼티모어경인 그의 아들 세실리우스 캘버트(Cecilius Calvert)가 마침내 특허장을 받아내 1634년부터 식민지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정착민이 모자라자 프로테스탄트 교도들도 이주하도록 장려했다. 캘버트는 식민지에서 카톨릭 교도는 언제나 소수일 것임을 깨닫고 1649년 ‘종교에 관한 법’(Act Concerning Religion)으로 구현된 종교적 관용정책을 채택했다. 이 법은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매릴랜드의 정치는 수년동안 소수인 카톨릭 교도들과 다수인 프로테스탄트 교도들간의 긴장과 잦은 폭력으로 재앙 상태에 이르렀다.(Brinkley 1998)

1636년 뉴타운의 목사인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는 매사추세츠 정부에 반기를 들고 자신의 신도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서 하트포드(Hartford) 마을을 건설했다. 4년후 하트포드 사람들과 근처에 새로 건설된 두 개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정부를 세우고 ‘코네티컷 기본법’(the Fundamental Orders of Connecticut)으로 알려진 헌법을 채택했다.

코네티컷강 연안의 뉴헤이븐 주변에서 또 다른 식민지가 성장하였고, 하트포드와 달리 이 식민지는 보스턴 식민지 건설자들의 종교적 방종에 대해 우려했다. 1639년에 만들어진 ‘뉴헤이븐기본법’(the Fundamental Orders of New Haven)은 매사추세츠 식민지보다 더 엄격한 신정(Bible-based) 정부를 건설했다.(Brinkley 1998)

매사추세츠 세일럼에 살던 목사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 1603-1683)는 확고한 분리주의자로서 매사추세츠 교회가 영국 국교회에 대하여 명목상의 충성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근의 인디언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식민지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본래 왕이나 매사추세츠 회사 소유가 아니라 원주민들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식민지 정부가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해 쫓아내려고 하자 그는 그 전에 도피했다. 그는 1635-36년의 겨울 동안 내러갠시트(Narragansett) 인디언들에게 숨어 있다가 봄이 되자 그들로부터 일대의 땅을 사서 몇몇 추종자들과 함께 프로비던스(Providence: 섭리) 마을을 건설해 완벽한 종교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했다. 고통과 박해 속에서도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역사(役事)임이 분명하다고 판단해 ‘섭리의 땅’으로 명명한 것이다. 1644년 영국 의회로부터 특허장을 받아낸 그는 프로비던스 주변의 정착지를 통치할 정부를 만들었다. 로드아일랜드의 탄생이다. 한동안 로드아일랜드는 유태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 아무런 제약없이 허용된 유일한 식민지였다.(Brinkley 1998, 정만득 2001)

1629년 두 사람의 영국인 경영인에 의해 뉴햄프셔와 메인이 건설되었다. 뉴햄프셔는 1679년에 독자적인 식민지가 되었으나 메인은 1820년까지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해서 1630년대 말 영국 정착민들은 앞으로 미국 공화국을 구성할 13개의 주 중에서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메릴랜드,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뉴햄프셔 등 6개 주를 건설하였다.

뉴잉글랜드 초기 정착민들은 일반적으로 인디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들로부터 농업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점차 갈등 관계로 접어 들었다. 그 이유에 대해 브링클리(Brinkley 1998)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백인 식민지인들이 토지에 대하여 지나치게 탐욕스럽고 그 결과 인디언 영토를 계속 잠식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 갈등의 특수한 성격과 백인이 인디언을 매우 잔혹하게 공격한 것은 원주민에 대한 퓨리탄의 태도에 기인하였다. 뉴잉글랜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인디언들을 신세계에서 그들이 신국을 건설하는 데 위협이 된다고 간주하였고, 특히 로저 윌리암스와 같은 이단들이 그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자 더욱 그런 생각을 굳혔다. 점차 인디언들은 고마운 이웃이라던 생각이 그들은 ‘이교도’이고 야만인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어 갔다.”

1637년엔 코네티컷 계곡의 영국인 정착민들과 그 지역의 피쿼트(Pequot) 인디언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다. 원주민들의 참패로 막을 내린 이 전쟁은 피쿼트 전쟁(Pequot War)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인들은 인디언 주민 600명을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성인 남자들은 모두 살해하고 소년들은 노예 상인에게 팔았으며 여자들은 청교도의 노예로 만들었다. 이 전투로 피쿼트족은 사실상 소멸되었다.(Davis 2004)

영국 정착민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대구였다. 1629년 세일럼의 청교도 목사 프랜시스 히겐슨은 “바다 물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했는데, 1640년에 이르러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세계 시장에 30만 마리의 대구를 수출했다. 대구는 각종 공식 문장(紋章)으로 사용되었으며, 훗날(1776년) 발행된 아메리카의 첫 주화에도 대구가 들어갔다.(Kurlansky 1998)

참고문헌
정만득, 『미국의 청교도 사회: 정착 초기의 역사』(비봉출판사, 2001).
앨런 브링클리(Alan Brinkley), 황혜성 외 공역, 『미국인의 역사(전3권)』(비봉출판사, 1998).
케네스 데이비스(Kenneth C. Davis), 이순호 옮김,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책과함께, 2004).
마크 쿨란스키(Mark Kurlansky), 박광순 옮김,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미래M&B, 1998).
데이비드 파커(David Parker) 외, 박윤덕 옮김, 『혁명의 탄생: 근대 유럽을 만든 좌우익 혁명들』(교양인, 2009).
스토 퍼슨즈(Stow Persons), 이형대 옮김, 『미국지성사』(신서원, 1999).

copyrightⓒ선샤인뉴스. All rights reserved.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선샤인뉴스가 마음에 들면 구독+해 주세요



TRACKBACK ADDRESS : http://www.sun4in.com/trackback/2382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