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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종교재판

지식사전/논술사전: 가 | 2009/09/30 08:57 | Reported By 선샤인뉴스

[선샤인 논술사전]

북부 폴란드 출생으로 아마츄어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1530년대 말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발표했다. 문예부흥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절이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한창일 때 태어났으며,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와 동년배였다. 그는 지동설을 취미로 창안해냈는데 친구와 제자들이 이것을 출판하도록 유도했다. 그는 거부했지만, 제자인 오스트리아 출신 게오르그 요하힘(Georg Joachim, 1514-1574)이 대신 요아힘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건 허용했다. 요하힘은 마법사로서 참수를 당한 마을 의사인 아버지의 낙인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레티쿠스(Rheticus)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1540년 초 단치히(Danzig)에서 책을 출판하였다.

이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天球)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간되었다. 지동설은 당시로선 용납되기 어려운 이단이었지만,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은데다 서기 2세기에 형성된 기존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체계의 많은 부문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어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게다가 책은 라틴어로 쓰여져 교회를 크게 위협하지도 않았다. 책의 출간 이전에 이미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접한 루터는 1539년의 설교에서 코페르니쿠스를 ‘건방진 점성가’로 부르면서 “이 바보는 전 천문 과학을 뒤엎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은 여호수아가 멈추게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며 그의 처형을 주장했다. 반면 교황 레오 10세는 코페르니쿠스를 지원하고 자문을 구하기도 했으니,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천구(天球)의 회전에 관하여』가 널리 배포되면서 점차 문제가 되었을 땐 코페르니쿠스는 이미 죽은 뒤라 문제삼기도 어려웠다.(Bernstein 2005, Boorstin 1986)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반세기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흘러가고 말았다. 반세기가 지난 1596년 독일의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가 『우주의 신비』라는 책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열렬히 옹호했지만, 지동설이 떠들썩하게 문제가 된 건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에 대한 종교 재판 사건이었다.

이렇듯 문제가 불거지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망원경이었다. 이미 1300년대의 베네치아에서는 안경 제작이 보편화되었으며, 망원경을 처음 발명한 사람도 단순한 안경 제작자였다. 1608년 네덜란드의 요하네스 리페르스헤이(Johannes Lippershey)라는 안경 제작자가 망원경을 발명하여 네덜란드에서 특허를 신청했다. 갈릴레오는 1609년 우연히 망원경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신이 직접 제작에 나섰다. 그는 그해 말 30배의 배율을 가진 망원경 제작에 성공했다. 그는 망원경을 베네치아 상원에 선물로 기증했다. 당시 망원경은 중요한 전쟁용품으로 여겨졌다. 상원은 망원경 제작의 공로를 인정해 다음 해로 끝나는 갈릴레오의 교수 임기를 종신 교수로 개정하고, 연봉을 두배로 올려주었다. 이게 그를 질투하는 동료 학자들의 원한을 사게 했고, 나중에 그의 인생이 험난해지는 이유가 되었다. 갈릴레오는 이미 발명된 망원경을 개량했을 뿐인데, 그에 대한 보상이 지나치다는 게 원한을 사게 된 주요 이유였다.

갈릴레오는 1610년 1월초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관찰 결과를 그해 3월 24페이지의 조그만 책자인 『별의 사자(使者)』로 출간했다. 이 책자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간 케플러마저도 갈릴레오를 설득할 수 없었으나 망원경이 설득한 셈이었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발견한 4개의 목성의 위성을 피렌체 메디치(Medici)의 코시모 2세(Cosimo II) 대공의 이름을 따서, ‘메디치 행성(Medicean planet)’이라고 명명했다. 또한 그는 대공에게 정교한 망원경 하나를 보냈다. 대공은 갈릴레오에게 금사슬과 메달 하나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해 6월 그를 피사(Pisa) 대학교의 수석 수학자 및 대공의 철학자로 임명하고, 수업 부담 없이 높은 연봉을 지급하게 했다. 갈릴레오는 1611년 4월 1일 로마에 도착해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를 알현하였고, 교황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있지 않아도 좋다는 극히 드문 은혜를 베풀었다.

피렌체로 돌아온 갈릴레오는 성경과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둘 다 진리라고 하는 논쟁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상호 모순을 피하기 위해 교묘한 설명을 제시했다. 진리는 하나뿐이나 이것은 두 개의 형태, 즉 성경과 자연의 두 개의 언어 형태로 전달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1613년 『태양 흑점 서신』을 출간함으로써 이단 혐의를 받게 되었다. 1615년 초 그는 로마로 소환돼 종교재판을 받았으나,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교재로 강의하는 것을 중지하라는 명령만 받고 무사히 넘어갔다. 이후 침묵하면서 지내던 갈릴레오는 1624년 자신의 후원자였던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추기경이 새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nanus VIII)로 취임하자 로마를 방문해 1615년의 금지 조치를 철회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 만남을 포함해 갈릴레오는 교황과 모두 6 차례에 걸쳐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지만 교황은 매번 갈릴레오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 거부가 시사하듯, 성직자들은 점점 갈릴레오가 이단이란 심증을 굳혀가기 시작했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1632년 2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주와 코페르니쿠스적인 우주를 비교하는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간했다. 이는 그의 비판자들에게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1633년 2월 갈릴레오는 로마로 송환돼 종교재판을 받았다. ‘공식 이단’ 판정보다는 한 단계 낮은 ‘중대한 이단 혐의’ 판정이 내려졌다. 6월 16일에 나온 교황의 선고는 무기징역형이었다.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는 금서가 되었고, 갈릴레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포기 선서를 명령받았다. 6월 22일 수요일 아침 그는 법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선언했다. 자신의 이전 주장들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단 색출에 적극 임하겠다고 밝히면서 다만 70세의 나이 등 개인적인 고통을 호소하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는 피렌체 교외 아체트리의 한 격리된 집에 유폐되었다. 그는 유폐소로 가기 위해 마차에서 내리던 중 “그래도 그것은 돈다!”(즉 지구는 태양 둘레를 돈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130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누군가가 꾸며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교황 대리자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갈릴레오를 방문할 수 없었다. 갈릴레오는 이후 4년 동안 책을 저술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종교재판이 그의 책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 책은 나라 밖으로 밀반출되어 출판되었다. 이 최후의 책은 나중에 아이잭 뉴턴(Issac Newton, 1642-1727)이 만유인력의 이론을 개발하는 실질적인 기초가 되었다. 뉴턴은 1705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여왕 앤이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림으로써 영국에서 과학적 공로로 영예를 받은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Bernstein 2005, Boorstin 1986, 오철우 2009)

갈릴레오는 생애 마지막 4년간 눈이 멀었는데, 이것은 망원경을 통해 하루 몇시간씩이나 태양을 관측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갈릴레오가 겪은 시련,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갈릴레오의 처세술이 뛰어난 게 적을 많이 만들어 화를 부른 이유가 되긴 했지만, 그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문제는 망원경이었다. 부어스틴(Boorstin 198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망원경이 있기 전에는 기독교 정통의 옹호자들도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금지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감각에 직접 호소하는 이 새로운 발명품은 하늘에 대한 신부들의 공소(控訴) 영역을 앞질러 침범했다. 천문학이 유식한 자의 신비스러운 이론으로부터 대중들의 경험으로 변모한 것이다.”

망원경의 반대편에 현미경이 있었다. 현미경은 망원경과 같은 시대의 산물이다. 갈릴레오도 망원경을 현미경으로 사용하고자 애썼다. 현미경에 의한 관찰 결과로 나온 의미있는 작업은 1665년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의 『현미경 도보(Micrographia)』라는 소책자였다. 그가 그의 렌즈를 통하여 보았다고 주장한 ‘신세계’는 처음에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이어 안토니 판 레이번훅(Antoni van Leeuwenhoek, 1632-1723)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관찰을 했는데, 사람들은 “확대경으로 본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본 것”이라고 비난했다. 레이번훅은 인간의 정자(精子)에 대한 현미경 관찰 결과를 왕립학회에 보고하면서 “식자(識者)들에게 불쾌하거나 분노를 사게 한다면 폐기해도 좋다”며 깊은 사죄를 표명해야만 했다.(Boorstin 1986) 

참고문헌
오철우, 『갈릴레오의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 태양계의 그림을 새로 그리다』(사계절, 2009).
윌리엄 번스타인(William Bernstein), 김현구 옮김, 『부의 탄생』(시아출판사, 2005).
다니엘 J.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 이성범 옮김, 『발견자들(전2권)』(범양사출판부,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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