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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세법 파동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와중인 1760년 조지 3세가 영국 왕위를 계승하였다. 22세의 조지 3세는 미성숙한데다 정신질환까지 있었다. 1763년 수상으로 임명된 조지 그렌빌(George Grenville)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식민지에 적극 관여하였다. 영국 정규군을 아메리카에 영구 주둔시켰다. 1765년의 반란법(the Mutiny Act)으로 식민지인들은 군대 주둔에 필요한 숙식을 제공하도록 요구되었다.

 사사건건 영국의 제조업 보호를 위한 경제적 규제도 잇따랐다. 이미 1732년 모자법(Hat Act)은 식민지의 비버 털 모자의 생산과 수출을 제한했으며, 1733년의 당밀법(Molasses Act)은 영국령 서인도제도 이외의 지역에서 수입되는 설탕과 당밀에 대해 중과세를 부과했으며, 1750년의 제철법(Iron Act)은 식민지인의 제철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했으며, 1764년 설탕법(the Sugar Act)은 프랑스와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와 불법 설탕 거래를 금지했으며, 1764년 화폐법(the Currency Act)은 식민지 의회의 지폐 발행을 금지했다. 

 가장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킨 것은 1765년 인지세법(the Stamp Act)이었다. 1765년 11월 1일 발효된 이 법은 식민지에서 발행되는 모든 서류, 즉 신문, 달력, 팜플렛, 증서, 유언장, 면허증 등에 세금을 부과했다. 이 덕분에 영국 정부는 곧 매년 1763년 이전보다 10배가 넘는 수입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인지세법은 엄청난 불만을 야기했는데, 특히 신문들이 분노했다. 정치적 의미를 떠나 우선 경제적으로 신문들에게 엄청난 타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문들의 비판에 자극받아 분노한 군중은 인지세법을 수용하는 인쇄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식민지 시기 말 문자해독률은 매사추세츠 85%, 버지니아 66%에 이르렀기에, 신문들은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Weir 1981) 당시 영국에서와는 달리 식민지 아메리카의 언론 통제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영국과는 달리 신문들이 넓은 지역에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찰스턴까지 소식을 하나 전달하는 데에도 29일이나 걸려야 했으니, 일사불란한 통제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765년 5월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는 버지니아 의회에서 극적인 연설을 했다. 그는 만일 현행 정책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조지 3세도 이전의 독재자들처럼 교수형에 처해질 지도 모른다는 예언으로 연설을 마쳤다. 거의 동시에 매사추세츠에서는 제임스 오티스(James Otis)가 동료 의원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과세에 대항하기 위해 식민지 연합회의를 소집할 것을 촉구했다. 그래서 1765년 10월 9개 식민지 대표들이 뉴욕에서 만나 소위 인지세법 의회(the Stamp Act Congress)가 열렸다. 여기에서 식민지 의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식민지에 과세할 수 없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왕과 영국 의회에 보냈다.

 1765년 여름부터 대서양 연안 여기저기서 물리적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스턴에서 새로 조직된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은 인지 취급 관리들을 협박하고 인지를 불태웠다. 영국상품 불매운동도 벌였다. 군중들은 보스턴 부총독인 토마스 허친슨(Thomas Hutchinson)과 영국편 귀족들의 집을 습격하고 약탈했다. 영국 상인들은 식민지 시장을 잃을 것을 염려해 영국 의회에 이 인기없는 법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1766년 3월 18일 새 수상인 록킹햄 후작(the Marquis of Rockingham)의 주장으로 이 법은 철폐되었다. 그러나 그는 철폐에 대한 반대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국 의회가 식민지에 대해 ‘어떤 경우에든지’ 권한을 지닌다는 것을 확인하는 선언법(the Declaratory Act)을 제정하였다. 식민지인들은 인지세법 철폐에 기뻐하느라 이 선언법에는 미처 주목하지 못했다.

 타운센드 관세에 대한 저항

 식민지인들은 인지세법 다음으로 반란법에 저항했다. 새로 들어선 윌리암 피트 내각의 실세인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Charles Townshend)는 1767년 영국 의회를 통해 두가지 방법을 조치했다. 식민지인들이 반란법에 따를 때까지 뉴욕 의회를 해산하는 동시에 영국에서 식민지로 수입되는 물품들에 타운센드 관세로 알려진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는 엄청난 저항을 초래했다.

 필라델피아 변호사 존 디킨슨(John Dickinson, 1732-1808)이 쓴 ‘어느 펜실베니아 농부의 편지(Letters of a Pennsylvania Farmers)’(1767)란 제목의 팜플렛이 널리 읽혔는데, 디킨슨은 이 팜플렛에서 수출입 관세가 세입을 증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역규제의 목적으로 고안되었을 때에만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점점 대부분의 아메리카인들은 그 구분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침내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절대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 슬로건은 원래 1215년 대헌장(Magna Carta)이 선포된 이래 영국인들이 줄곧 부르짖어온 것인데, 이제 미국인들이 더욱 과격한 방식으로 외치고 나선 셈이었다. 어떠한 종류의 세금이든지, 즉 내국세이든지 수출입세이든지, 세입을 올리기 위한 세금이든 무역규제를 위한 세금이든 상관없이 자신들의 대표가 참가하지 않은 본국 의회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진 과세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타운센드는 자신의 잘못 시행된 정책의 결과가 명백해지기 바로 직전인 1767년 말에 사망했다. 1770년 3월 새로운 수상 노스 경(Lord North)은 차에 부과된 관세만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타운센트 관세를 폐지했다. 이 소식이 식민지에 도착하기 전에 매사추세츠 보스턴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5명이 죽은 ‘보스턴 학살’ 사건

(사진=두산백과사전)

(사진=두산백과사전)


 인구 1만6천명의 보스턴엔 영국 정규군 4개 연대 (1만6천명)가 주둔하고 있었다. 보수가 매우 적었던 영국 군인들은 비번일 때는 부업을 해 이미 포화 상태인 노동시장에서 식민지 노동자들과 경쟁함으로써 식민지 노동자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선박 조립공장 노동자들과 그곳에서 일자리를 찾으려는 영국군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일어난지 며칠 지나지 않은 1770년 3월 5일, ‘자유 소년들’(liberty boys)이라는 부두 노동자 한 떼와 다른 사람들이 합세해 관세청 보초들에게 돌과 눈뭉치를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격투가 벌어지고 영국군이 총을 발사해 5명이 죽었다. 

 이 사건은 지역의 반항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로 명명돼 영국의 압제와 잔혹함의 상징으로 선전되었다. 이 사건은 ‘보스턴 거리에서 신에게 호소하는 무고한 피의 외침’(Innocent Blood Crying to God from the Streets of Boston)이란 팜플렛의 주제가 되어 널리 알려졌다. 은 세공사인 폴 리비어(Paul Revere, 1735-1818)의 유명한 판화는 이 사건을 평화로운 군중에 대하여 치밀하게 조직되고 계산된 공격으로 묘사했다. 보스턴 인구 1만6천명중 적어도 1만명이 사망자들의 장례식에서 행진을 벌였으며, 이 사건은 이후 모든 반항적 지도자들의 시위와 연설로 기념되었다.

 보스턴 사람들로 구성된 배심원 앞에서 재판을 받은 영국 군인들은 과실치사로 유죄판결을 받고 명목상의 처벌만 받았다. 다시 분노가 들끓었다. 이런 분노를 선동한 사람은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 1722-1803)로, 그는 식민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급진주의자였다. 1772년 그는 보스턴에 연락위원회를 창설해 식민지 전역에 만연한 영국에 대한 불만을 널리 알릴 것을 제안했고 자신이 첫 번째 위원장이 되어 활약했다. 이로써 식민지간의 느슨한 정치조직망이 조직되었는데, 이는 1770년대 내내 살아 있던 반항정신의 동력이 되었다.

 미국에서 ‘보스턴 학살사건’은 오늘날까지도 떠들썩하게 기념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 기념 토론회에 초청을 받은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보스턴 학살 사건이 토론회를 개최할 만큼 중요한 학살 사건으로 관심을 모으는 데 대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토론회가 열리는 유일한 학살사건일 것입니다.…그 토론회는 어떻게 해서 이 집단이 미국 역사에서 일어난 그 수많은 흥미로운 사건 가운데 하필이면 대량 학살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로 사상자가 아주 적은 그 사건에 주목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로 비쳐졌습니다.…그때 저는 미국 역사에 있었던 다른 다량 학살 사건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인디언 학살을 언급한 남북전쟁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나요?”(Zinn & Macedo 2008)

 유재현(2009)은 “5명이 사망한 사건을 두고 학살이라는 이름을 붙인 작자들은 학살을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보스턴 학살이란 사실 영국군의 발포에 단 3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부상을 입은 2명은 나중에 죽었다). 미국의 독립이란 그 학살만큼 허망하고 기만적인 프로파간다로 가득 찬 사건이다. 독립전쟁은 미국을 지배하게 된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낮은 계층에 속한 백인들의 목덜미를 끌고 와 벌인 전쟁일 뿐이며 당시 유럽에서 벌어지던 그 수많은 전쟁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도 없는 전쟁이었다. 다만 미국에는 왕이 없었을 뿐이다.…보스턴 학살이 학살이라면 콘크리트 전봇대에서는 꽃이 필 것이고, 미국 독립전쟁이 혁명이라면 나는 내일부터 죽을 때까지 맥도날드 햄버거만 먹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해야지 어쩌겠는가. 어느 나라건 다 이 정도의 역사 왜곡과 미화는 저질렀을 터이니, 미국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욕 먹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너그러운 시선으로 보기로 하자. 앞으로 장시간에 걸친 미국사 산책을 위해선 그렇게 편안하게 마음 먹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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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중, 『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 미국의 정체성을 읽는 네 가지 역사적 코드』(소나무, 2001).
사루야 가나메, 남혜림 옮김, 『검증, 미국사 500년의 이야기』(행담출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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