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의 흥행과 모방작의 홍수
<개구리 남편>이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드라마 경쟁에 기름을 부은 것은 TBC의 <아씨>였다. <아씨>는 70년 3월 2일부터 71년 1월 9일까지 방영되었는데, 당시로선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아씨>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30년 동안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지체가 높고 체통을 내세우는 양반댁으로 시집 온 아씨가 남편의 무절제한 외도와 냉대 속에서 기막힌 운명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인내와 순종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지아비를 섬기는 내용이었다. <아씨>의 인기 비결은 무엇이었을까?『한국방송사』는 <아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아씨>가 TV 드라마 사상 굉장한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 아씨가 자기 희생을 일관해 온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운명에 대한 깊은 동정과 공감 때문이었으리라. … <아씨>가 방영되는 동안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문단속을 잘 하여 도둑을 조심하고 수도꼭지가 꼭 잠겼는지 다시 한번 점검한 뒤에 이 프로그램을 시청해달라는 내용의 이색 스포트가 방송된 것은 방송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아씨의 남편(김세윤 분)이 한창 외도를 하며 아씨를 냉대하는 장면들이 속출되고 있을 무렵 부인들이 떼를 지어 방송국으로 몰려와 남편을 작품에서 죽여 주든가 개심시켜 달라고 사뭇 협박조의 간청을 하던 일도 <아씨>를 화제 머리에 올릴 때는 빼놓을 수 없는 토막 얘기가 될 것이다.”
의 주연배우 김희준" filename="cfile26.uf@121348014B870B064E18D9.jpg" filemime=""|드라마 <아씨>의 주연배우 김희준'> <아씨>는 방송가에서도 다양한 화제 거리를 낳았다. 당시 <아씨>에 출연한 연인원은 무려 1천2백 명이 넘었으며, TBC 소속 탤런트 전원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출연하는 기록도 남겼다. <아씨>는 도중 작가가 교체되기도 했다. 애초엔 임희재가 집필했지만, 건강이 악화돼 190회쯤에 이르러 이철향이 대필하기 시작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임희재는 마지막 씬만은 반드시 자신이 써야 한다고 주장할만큼 <아씨>에 강한 애착과 집념을 보였고 결국 하룻밤을 꼬박 새워 원고를 완성했다고 한다. <아씨>의 인기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아씨>가 방송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각 영화사들이 경쟁적으로 영화화를 시도하여 드라마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2편의 영화가 상영되었으며 주제가도 히트를 쳐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아씨>는 <개구리 남편>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우선 남편의 외도와 불륜을 소재로 했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아씨>는 <개구리 남편>에 쏟아졌던 ‘저속’ ‘퇴폐’ 등의 비난은 거의 받지 않았다. 물론 가정 주부의 거센 항의를 받긴 했지만, 그것이 사회적 논란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른바 ‘학습효과’가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다. 불륜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겠지만, 쓰나미급 ‘문화충격’을 경험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가 설정한 시대배경 차이도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개구리남편>이 동시대를 배경으로 불륜을 다룬 반면 <아씨>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30년 동안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남편의 무절제한 외도와 냉대 속에서도 인내와 순종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지아비를 섬기는 전통적 한국여인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불륜은 당장 자신의 가정을 깨뜨리는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먼 과거의 일은 현재의 내 ‘가정의 안정’을 해치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 시청자들이 아씨의 고통과 설움을 보며 때론 가슴을 졸이긴 했겠지만, 때로 그것이 항의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아씨>에 감정이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일일연속극의 본격적인 롱런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닮았다. 한국 TV 드라마 사상 최초로 일일연속극 100회를 돌파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었지만, 장기 방영의 초석을 놓은 것은 <개구리남편>과 <아씨>였다. <개구리남편>은 100회를 방영했지만, <아씨>는 무려 253회나 방영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횟수였다. 특히 <아씨>의 영향이 컸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일연속극은 월간 단위로 기획, 제작되었는데, <아씨> 이후 본격적인 롱런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일일연속긍의 롱런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일일연속극의 안방 대공습
1970년 8월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실시한 시청률 조사에 따르면, TBC는 46%로 27%에 그친 KBS와 MBC를 압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아씨>의 높은 인기 덕분이었다.(김해식, 1993). <아씨>의 성공은 드라마의 판도 변화마저 불러왔다. <아씨>의 대성공에 힘입어 TV 3사 모두 주간연속극 숫자를 줄이고 일일극에 치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쟁에 불을 당긴 것은 <아씨>로 톡톡히 재미를 본 TBC였다. 70년 8월부터 오후 8시대에 매일 1편씩 방송했던 주간연속극 2개를 폐지하는 대신 일일연속극을 하루 2편씩 방송하기 시작한 것이다.
MBC와 KBS가 맞대응하고 나섰다. 1971년 일일연속극은 전년에 비해 4편이 늘어 13편에 달했고 반대로 주간극은 12편에서 9편으로 줄었다. 이 때문에 일일연속극이 방송사들의 ‘기간전략품목’으로 정착되었다는 분석마저 나왔다.(조항제, 1994) 더 심각한 문제는 20분을 주축으로 한 일일연속극이 모두 오후 7시에서 10시에 이르는 이른바 황금시간대에 편성되었을만큼 편성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오죽했으면, “상대방 프로그램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식으로 전쟁을 방불케 한다”는 이야기마저 나왔겠는가.
당시 방송사들간 일일연속극 경쟁에 대해 정순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71년도의 TV 기본 편성표를 보면, KBS가 오후 8시 20분과 9시 30분, TBC가 오후 7시와 8시 30분과 10시 정각, MBC가 오후 7시 50분과 9시 10분과 9시 40분에 각각 20분 일일극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편성해놓고 팽팽히 맞서 나갔으니, 참 대단한 싸움이었다. 반면 사회 교양프로그램은 점점 줄어들고, 오락 프로그램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일일연속극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드라마의 질 하락은 더욱 부추겼다. 열악한 환경에서 촬영해야 할 분량이 갑작스럽게 늘어나다 보니 졸속 제작 문제는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졸속제작이 대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열광하고 있었으니. 아마 방송사에선 그런 생각을 했음직하다. 일일연속극은 최소한의 제작비를 들여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마법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연진은 “<아씨>의 등장 이후부터 한국의 TV 드라마는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른바 안방의 눈물짜내기 드라마가 등장한 것이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TV드라마의 작품에 대한 비중보다 시청효과에 주안점을 둬야 하는 임무가 내려졌다. 따라서 제작자는 ‘TV드라마는 우선 감동적이어야 된다’는데 중점을 두고 ‘시청자를 울려라’는 대명제의 북을 치게 되었다. ‘아씨’의 등장이 마치 눈물 짜내기 드라마의 계기를 가져다 준 것처럼 그 이후부터 멜러물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한국적 TV 드라마가 새로 생성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씨>를 모방한 작품들도 경쟁적으로 등장했다.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안정적인 시청률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성공한 작품을 모방하는 것 이상 좋은 게 없다. 실패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재와 내용을 조금만 달리 해서 변주하더라도, 일일연속극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시청자를 텔레비전 앞으로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사들이 그런 생각을 했음인지, <아씨>의 성공 이후, KBS는 <가시리>, <신부들>, <파도>, <봉녀>를 TBC는 <세자매>, <마부>, <동기>, <사슴아가씨>, <생명>을, MBC는 <정>, <왈순아지매>, <학부인>, <갈대의 노래>, <새댁> 등 비슷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물론 이들 일일연속극은 대부분이 남성의 여성편력을 다룬 ‘불륜 드라마’나 통속극이었다.
<아씨>를 필두로 한 일일연속극의 바람몰이는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년대비 수상기 증가율이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났던 1969년(89.2%), 1970년(69.7%), 1971년(62.4%)으로, 이 3년간은 일일연속극의 인기 상승률이 가장 높았던 때였다. TV 수상기 100만대 돌파도 일일연속극이 정점에 달했던 1972년 중반에 달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아씨>를 비롯한 일일연속극이야말로 박정희 정권이 추구했던 ‘TV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이끈 견인차였다. 물론 TV 수상기의 급속한 확산은 방송사가 일일연속극 제작 편수를 더 늘려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일일연속극의 성공과 TV 보급의 함수 관계가 말해주듯, 당시 시청자들의 TV 구입의 주요 목적은 일일연속극 시청이었기 때문이다.
TV 수상기의 급증은 드라마의 통속화를 부추기는 요인이기도 했다. 강준만은 “TV가 점점 대중화되면서 그 내용도 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유층만이 TV 수신기를 보유할 수 있었을 때엔 아무래도 중상층 취향을 고려해야 했으나 점점 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수신기 대중화에 따른 내용의 통속화가 시도된 것이다.”
‘스타시스템’의 등장과 탤런트 스카우트 경쟁
앞서 말했듯, TBC-TV와 MBC-TV의 개국은 탤런트 스카우트 경쟁을 불러 왔다. 특히 MBC-TV의 개국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동아일보』70년 11월 28일자 <올해의 문화계 : 방송>은 “삼국간의 추잡한 탤런트 스카우트 경쟁으로까지 치달았다”고 개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치열할 스카우트 경쟁은 급증한 드라마 편수와 일일연속극의 롱런 때문이었다. 71년 현재 3국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는 모두 21편에 달했으며, 일일연속극도 한 번 시작했다 하면 2백회를 넘기기 일쑤였다.
스카우트 경쟁은 탤런트 간 빈부격차와 갈등마저 불러 왔다. 비슷비슷한 소재와 내용의 드라마가 안방을 장악하다보니 아무래도 시청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기가 높은 탤런트들의 주가가 올라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아일보』 71년 6월 26일자 <TV탤런트 브라운관이 낳은 대중오락 시대의 우상>은 “각 국에서 특A급 및 A급 대우를 받고 있는 톱 탤런트들의 수입은 월 평균 50만원선을 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그 수자는 50여명 정도. 45분짜리 드라마의 경우, 한 프로당 2만5천원에서 2천5백원까지, 5, 6개의 급이 있어 상하의 차이는 심각하다. …삼국이 경쟁에 몰두, 스카우트에 따르는 추문이 꼬리를 물고 질서있던 탤런트간에 불신풍조가 도를 더해하고 있는 현실…. 같은 탤런트사회에도 심각한 수입격차를 초래하고 2,3년 된 C, D E급은 회당 출연료가 고작 1천원에서 1천5백원에 머물고 있다. 작년 모국의 중견탤런트가 빚에 몰려 피살된 예가 있는가 하면 자칫 허영에 흘러 앞길을 망치는 예도 적지 않다.”
스카웃 경쟁은 영화 배우들의 TV 입성도 불러왔다. 70년대 영화계의 1대 트로이카로 불리던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도 영화의 높은 인기를 발판으로 안방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유명 배우의 경우, 수입도 영화보다 TV가 훨씬 좋은 편이었다. 영화 배우의 드라마 출연은 영화의 몰락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TV 수상기의 급증은 더 이상 극장을 찾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었고, 영화의 주요 관객층이었던 30, 40대 여성층 관객을 TV가 있는 안방극장에 주저 앉히는 효과를 불러 왔기 때문이었다. 69년 연인원 1억9천명을 기록했던 영화 관객은 72년 1억 2천 명으로 급감했으며, 줄어든 관객 숫자를 반영하듯 70년 231편이 제작됐던 한국 영화는 72년 112편으로 급감할 만큼 영화는 TV 대중화의 직격탄을 맞았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방송 3사간의 스카우트 경쟁은 부메랑 효과를 낳았다. 스카웃 비용이 급증해 방송사의 부담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스카웃 경쟁은 전속제에도 균열을 불러 왔다.
『동아일보』71년 12월 23일자 <허물어지는 TV탤런트 전속제>는 “MBC TV와 TBC TV는 탤런트전속제를 내년부터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전반적인 불황에 따라 상업방송의 과도한 경쟁이 무의미해지고 전속제로 탤런트를 묶어둘 예산상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취해진 조처로 앞으로 TV브라운관의 드라마는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금년말로 23명의 전속계약이 끝나는 MBC TV는 새해부터 이들 전원을 프리화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재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최소한 6백 여만원의 목돈계약금이 필요하며 또한 이들을 묶어둘 경우 쓸데없는 예산이 소요된다는 판단하에 취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MBC-TV는 앞으로 계약전속이 아닌 60여명의 자체탤런트를 활용하고 신인탤런트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외부 탤런트의 기용을 강화할 것 같다. …TBC도 전원 프리화를 방침으로 하고 있지만 한꺼번에 이를 실현할 경우에 생기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내년 1월과 6월 12월중 3단계로 전속을 풀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TBC는 앞으로 가능한 한 작품별 전속계약을 시도할 계획이다. 이와 같은 TV탤런트들에 대한 전속제의 폐지로 스카웃의 열풍은 어느 정도 가실 것이 예상되는데 드라마는 주인공들의 얼굴이 내년부터 많이 달라져 다양한 연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탤런트 스카우트 경쟁을 중지하겠다는 방송사의 약속은 구두선에 그쳤다. 이후에도 인기 탤런트를 빼앗고 지키기 위한 방송 3사의 눈물 겨운 경쟁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비용 절감을 위한 방송 3사의 노력은 신인 연기자 발굴의 촉매가 되기도 했는데, 70년대에 이미 이른바 ‘길거리 캐스팅’ 시도가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당시 ‘길거리 캐스팅’ 장소 가운데 하나는 여대 앞이었다. TV 수상기 급증으로 탤런트가 인기있는 직업으로 부상하고 있긴 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길거리 캐스팅’은 낯선 일이었고, 이 때문에 연출가들은 때로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김연진이 전하는 <파도>(72년) 제작 당시 에피소드를 감상해보자.
당시 임학송씨는 주연을 맡을 연기자의 이미지를 물색하기 위해 멋쟁이들이 돌아다닌다는 E여대 앞에서 특유의 빵모자를 쓰고 서성거리다가 치한으로 몰려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애인을 찾는 것처럼 대학 문 앞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여대생들의 얼굴만을 뚤어져라고 지켜보고 있으니 경비가 임무인 수위들 눈에 걸리 수밖에 없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오?” “나는 방송국에서 나온 연출자요!” 임학송씨의 말소리는 두툼하고도 컸지만 그들에게 그 말이 통할 리 없었다. 그만 수위들 손에 이끌려 인근 파출소로 끌려갔다.”
<참고문헌>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2』(인물과사상사, 2002), 104쪽.
고성원, <아씨와 작가 임희재>. 한국TV방송50년위원회, 『한국의 방송인: 체험적 현장기록 한국방송 1956-2001』(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김연진, 『내 연출 내 젊음 : 김연진의 TV 비망록』(다인미디어, 2000), 125-126쪽.
김학수, 『스크린밖의 한국영화사 1』(인물과사상사, 2002), 229-231쪽.
오명환, 『텔레비전 드라마 사회학』(나남출판, 1994), 80쪽.
임종수, <1960~70년대 텔레비전 붐 현상과 텔레비전 도입의 맥락>, 『한국언론학보』48권 2호, 87쪽;
정순일, 『한국방송의 어제와 오늘: 체험적 방송 현대사』(나남, 1991), 185-186쪽.
한국방송공사, 『한국방송사』(한국방송공사, 1977), 823-825쪽.
<TV탤런트 브라운관이 낳은 대중오락 시대의 우상>,『동아일보』 71년 6월 26일, 5면,
<허물어지는 TV탤런트 전속제>, 『동아일보』, 1971년 12월 23일,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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